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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읍 산척리 이경선묘(鎭川邑 山尺里 李慶善墓) 본문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벽오(碧梧) 이시발(李時發)의 다섯째 아들이다.
이경선(李慶善)은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32년(인조 10)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성균관박사·저작·전적 및 호좌좌랑을 지냈다.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재직하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의 명령에 따라 군사를 모집하여 광주(廣州) 검천(劍川)까지 올라가 진을 설치하고 청나라 군대와의 일대 격전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광주 검천에 진을 치고 있던 정세규의 충청감영군은 이튿날인 12월 27일 이른 아침에 산봉우리에 있던 청나라군이 짙은 안개를 타고 기습해 옴으로써 미처 대비하고 있지 못하다가 혼란에 빠졌다. 감사 정세규는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가 간신히 살아나고, 많은 수령들이 죽은 곳을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이경선은 연산현감 김홍익(金弘翼)과 더불어 주장(主將)을 대신하여 군량미를 쌓아놓은 노적가리로 올라가 병사들을 지휘하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주장과 상당수의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여 전세를 돌이킬 수 없었다.
이에 이경선은 죽음을 결심하고 다시 노적가리 위로 올라가서 칼을 고쳐 잡고 청군 수십 명을 베어 죽이면서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집중적인 공격에 오른팔이 잘려 나갔고, 다시 왼손으로 칼을 부여잡고 적진으로 돌격하다가 끝내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일설에는 그가 적군에게 사로잡혔는데 왼손으로 인신과 부절(符節)을 꽉 잡고 굴복하지 아니하자 적이 그 손을 쳐서 끊었는데, 다시 오른손으로 그것을 잡으니 적이 연이어 공격하여 오른팔마저 베어냈으며, 이에 이경선이 또다시 입으로 머금고 죽었다고 한다.
전사일은 12월 27일이었으며, 향년 37세였다. 이경선의 시신은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1월 19일에 가서야 수습할 수 있었는데, 몸에 창 자국 투성이였고 형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차고 있던 허리띠와 병부(兵符)가 시신과 함께 노적가리 위에 있었기에 판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마을 뒷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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