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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산성리 이용기선생 의열비(報恩邑 山城里 李龍基先生 義㤠碑) 본문
산성리는 마을뒤로 잣미산(함림산)이우뚝하고 마을앞으로 보청천 상류가 흐른다. 동쪽은 학림리, 서쪽은 장속리, 남쪽은강산리와 교사리,북쪽은 내북면 서지리에 접하고있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구이목리와 송정리를 병합하여 내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87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산성1리(구이목,송정)와 산성2리(잣미)로 나뉘어 보은읍에 편입되었다.자연마을로는 송정과 구이목, 잣미가 있다
산성리 잣미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용기선생의 의열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의사이공용기선생의열비(義士李公龍基先生義烈碑)라고 각자되어 있으며 단기4320년(서기 1987년)에 내북애향동지회에서 건립하였습니다.
이용기(1880. 7. 22.~1942. 2. 7.)는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 내북면(內北面) 산성리(山城里) 33-2번지에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 를 발표하면서 전국에 거쳐 3・1운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보은지역에서는 4월에 이르러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4월 2일 산외면 어온리, 이식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제에게 사전에 제지되었으나 다음날인 4월 3일에는 이식리 주민 100명이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후 4월 4일 마노면 세중리, 4월 5일 회북면 중앙리, 4월 7일 회남면 금곡리와 조곡리, 회북면 애곡리와 부수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자 하였으나 모두 일제의 사전 탐지와 탄압 제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4월 8일에는 내 북면 서지리와 산성리 일대에서 이용기(李龍基)·구열조(具悅祖)·윤정훈(尹鼎勳) 등의 주도로 독립만세운동이 실행에 옮겨졌다. 평소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던 중에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에 찬성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4월 8일 야간에 산성리(현 보은읍 산성리 잣미길) 서쪽의 노고산성 (老姑山城) 쪽 언덕 위에서 마을 주민 약 20명에게 한국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였다. 이에 주민들이 찬성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일경들의 잔혹한 탄압을 받고 검사국으로 넘겨져 신문을 받은 과정에서 고초를 겪으면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실행하였음을 당당히 밝히고 독립운 동을 전개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경성복심법원 법정에서도 자신은 “‘대정8년 3 월 이후 조선 각 지역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는 방법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는 것을 알고 그 취지를 찬성하여 이와 동일한 행동’하기로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조선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외쳤으며 자신은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다.”고 공술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正義), 인도(人道)에 근거 하야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므로 제1심 및 제2심에서 받은 유죄의 판결은 부당하며 복종할 수 없는 위법(違法)한 것”이라며 상고하였다. 조선총독부 고등법 원은 상고 이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상고 기각을 선고하였다. 그리하여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1919. 5. 6.)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경성복심법원(1919. 6. 4.)에 항소하고 고등법원(1919. 7. 10.)에 상고하 였으나 항소·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표장을 추서하였다.
산성리는 노고산성 밑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그 유래를 자연마을인 ‘잣미’에서 찾기도 한다. 잣미란 본래 ‘잣뫼’ 였고‘잣’은 순 우리말로 성(城)을 뜻하고 ‘뫼’는 산을뜻하여 그대로 옮기면‘성산리’가 되어야 했지만 어떤 이유에서 인지 산성리가 되었다. 잣나무가 많아 잣뫼,잣미,백봉(栢峯)으로 불렀다는 해석도 있는데 ‘잣’을 성(城)이 아닌 잣나무(栢)로 보는것은 잘못이다. 잣미는 보은지역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곳이기도 하다. 잣미 출신의 이용기의사가1919년 4월8일 마을사람을 이끌고 노고산 정상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친것이 보은 최초의 만세운동이다. 1987년 보은유도회와 내북면애향동지회에서 세운 의사이용기선생의열비가 있다. 잣미는1970년대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도했다. 당시 청년이었던 최기환씨 (2015년작고)가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비닐하우스에 고추,수박,토마토등채소를 재배해 고소득을 올린것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된 것이다. 비닐하우스 재배법은 1976년 12월 박정희대통령에게도 보고되어 당시 새마을지도자였던 김월련(74)씨가 새마을훈장협동장을 수상하고 동남아시아3개국을 순방하는영광을 안았고 1977년에는 외국인홍보마을로 지정돼 많은 외국인과 북한귀순자들이 잣미를 방문하기도 했다. 잣미는 부안임씨집성촌으로마을입구에 부안임씨감찰공파 세거지를 알리는 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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