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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면 사담리 면사무소석물(沙梨面 沙潭里 面事務所石物)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사리면 사담리 면사무소석물(沙梨面 沙潭里 面事務所石物)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9. 5. 13:33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면사무소내에 연못에 보면 용문양이 새견진 분수대로 사용되는 석물을 볼수가 있습니다.조각의 모양이 정교하며 많은 공을 들인 석물로 보입니다. 이 석물이 이 곳 면사무소 연못에 위치하게된데는 나름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보고 그냥 넘길수도 있지만 이 돌의 용도와 출처를 알면 민족의 아픈역사를 볼수가 있습니다.

 

 

충북 괴산군 사리면사무소에는 아픈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석물이 하나 있다.사리면사무소 연못에는 용 문양을 양각한 90×90×60㎝ 크기의 분수대가 있다.이 분수대는 1942년 사리면 방축리 삼거리 마을 동쪽 언덕에 세운 일본 신사(神祠)에서 가져다 놓았다. 참배객은 신사 참배에 앞서 손과 입을 씻어야 하는데 그때 쓰던 석물로 추정하고 있다.일본어로 테미즈야(手水舍) 또는 쵸즈야라는 시설물에 놓은 수반(水盤)이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이 테미즈야 수반이 면사무소 연못의 분수대로 사용한 사연은 이렇다.

사리면 신사는 광복 후 격분한 주민이 헐어버렸고 그 곳에는 많은 석물이 나뒹굴고 있었다.1956년 봄에 당시 손근성 면장이 주민 10여 명을 동원해 신사 터에서 이 수반을 면사무소로 옮겨 연못을 파서 그 안에 놓았다. 서울 등지에서 용을 새긴 이 수반을 사 가려고 했으나 손 면장은 팔지 않았고 그뒤에도 면에 잘 보존해야 한다고 거듭 부탁했다.

손 면장은 이 수반을 잘 보존해 후세에 교훈으로 남겨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사 참배는 일제강점기 많은 한국인에게 강요한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일제는 '1면 1신사 원칙'을 내세워 강제로 신사를 건립하도록 해 광복 직전 충북에는 109개 읍·면 중 74곳에 신사를 세웠다고 한다. 일제가 한국인의 참배를 강요한 이 신사는 광복 직후 대부분 철거했지만 일부 지역에는 당시의 시설물이 남아 있어 식민지 민족의 아픔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사리면사무소 인근 사담리 하도마을에는 신사 터에서 옮겨 놓은 3개의 비석이 있다.이 비석에는 '재건청년회', '하도농업협동조합', '荷島'(하도) 등의 문구를 음각했다.1961년에 세운 이 비석 뒷면에는 신사 건립 당시 새긴 문구를 쪼아낸 흔적이 보인다.

 

사리면 하도마을에 있는 신사에서 옮겨온 비석입니다. 후대에 새겨진 글자들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