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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동 안유풍묘지(山城洞 安遺豊 墓地)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산성동 안유풍묘지(山城洞 安遺豊 墓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1. 9. 19. 23:06

안유풍의 묘소입구에 있는 단풍나무 군락지입니다.

민영휘(1852.5.15.~1935.12.30.)1877년(고종 14년) 별시에서 병과로 합격합니다,, 그 뒤 승진을 거듭하며 화려한 관력을 쌓게 됩니다. 이 민영휘는 명성황후와의 촌수는 그냥 같은 여흥민씨 정도입니다, 민승호 민겸호는 명성황후와 12촌이라는 촌수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이 민영휘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이 자는 청나라와 밀착한 수구파의 거두로서 32살인 1884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대를 이용하여 친일 개화 세력을 몰아냈으며, 위안스카이(원세개)와 결탁한 뒤 사대당 내각에 들어가 전권을 휘둘렀습니다, 이때 명성황후의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1886년 참의 내무부사, 1887년 도승지를 역임하였고, 도승지로서 주차 일본 변리공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온 뒤 평안감사에 올랐고 1889년 강화부 유수로 전직했다가 협판 내무부사에 오르고 이어 형조·예조·공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였으며, 1891년 경리사·이조 판서를 거쳐 1893년에는 내무부 독판·통영사·선혜아문 당상을 겸직하고 이듬해 친군경리사(親軍經理使)가 되었습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정부좌찬성(左贊成)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갑오경장 와중에 실각하여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로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평양으로 잠행하여 벽동의 청나라 포대에 잡혔다가 청나라로 도망갑니다, 1895년 대사령으로 흥선대원군 측의 이준용과 교환되어 귀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해에 명성황후는 암살을 당해 죽습니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1877년부터 1895년까지 8년간을 명성황후와 함께 헀습니다, 그 후는 고종과 함께하는 것입니다,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후원하여 중추원 의장, 시종원경, 헌병대 사령관, 1906년 7월 5일 육군 부장으로 표훈원 총재 등을 역임하였으나, 이후로는 정치권에서는 밀려나 1906년 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설립하였습니다,1907년 9월 19일 육군 부장직에서 퇴역하였고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금을 받았으며, 그밖에 매국 공채 5만원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일본강제병합을 당한 후 25년이 지난 1935년에 83살로 죽습니다

[지명수배]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 행적 민영휘 묘소 (youtube.com)

안유풍은 민영휘의 첩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최대 갑부였던 민영휘의 여성 편력은 화려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민영휘의 정실부인은 ‘대방(大房)마마’로 불렸던 신씨(申氏)였다. 신 씨와는 사이에선 아들이 없었다.민영휘의 첩인 안유풍은 ‘해주마마’로 불렸다. 민영휘에겐 이 외에도 평양마마, 연당마마 등 여러명의 첩을 두었다.민영휘와 안유풍 사이엔 대식‧천식‧규식의 세 아들이 있었다. 셋째 아들 민규식은 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올랐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거물 친일파가 된 것이다.

 

민영휘는 자신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휘문학원을 설립한 인물. 그의 첩이었던 안유풍은 현 풍문여고를 설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론 1936년 안유풍이 죽자 그의 아들이 ‘어머니의 유훈’이라며 설립자금을 내고 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풍문여학교를 설립하면서 안유풍의 ‘풍자’를 따 풍문학원이라 이름을 지었다.

 

산성내에 있던 안유풍의 묘는 후손들에 의해 이장되었고 지금은 텅빈 자리로 남아있습니다. 묘지 조성을 할 때 심었던 단풍나무들은 군락을 이루고 말이 없습니다 안유풍의 무덤 밑에는 일제강점기 한일은행 지점장대리를 지낸 안유풍의 아들인 민천식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유풍의 아들인 민천식의 묘는 아직도 산성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장하기전 안유풍의 묘지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텅빈 안유풍의 묘지가 있던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