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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동 민천식묘지(山城洞 閔天植墓地) 본문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내에 자리하고 있는 친일파 민영휘와 안유풍의 아들로 한일은행 지배인대리를 지낸 민천식의 묘지입니다.추도비와 묘비 그리고 망주석2점과 문인석2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민천식의 묘지위로는 그의 모친인 안유풍의 묘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장되고 무덤으로 쓰던 빈터만 남아있습니다. 민천식의 묘밑으로는 청주시에서 운영하는 생태공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공원을 다녀가면서 이 곳이 민영휘의 아들인 민천식의 묘라는걸 알고 또한 역사의 슬픔을 알고 있는지 참 궁금합니다.
민천식은 민영휘로 부터 많은 땅을 물려받은 듯 하다.기사에 나오는 민대식,민규식등은 모두 민천식과 형제지간이다.1923년 3월10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이 날짜 東亞日報에 의하면 東洋拓殖株式會社 所有土地는 26,403,000坪이며 個人別 大土地所有者는 閔大植 6,999,000坪, 閔奎植 4,317,000坪, 閔應植 4,143,000坪, 閔天植 3,558,000坪, 李埈 3,033,000坪, 尹德榮 2,949,000坪, 趙命九 2,904,000坪, 閔丙奭 2,793,000坪, 白寅基 2,703,000坪 등이다.
민천식의 아바지 민영휘가 죽자 1936년 6월1일 잡지 삼천리 제8권 제6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리게 됩니다.
"一千二百萬圓이라는 閔泳徽 財産은 어듸로 가나? "
序曲
『大匡輔國崇錄大夫子爵』 閔泳徽氏! 이러케 肩書를 써 노코 보니 그야말로 人臣의 最高水準 우에 榮職을 가진 분이다.
여기다가 朝鮮 第一位의 富豪를 兼또려 노코, 또 壽, 富, 貴 多男子로 繡를 노코, 거기에 潤色하기를 臥席終身의 終告平生을 하엿다면 그야말로 五福의 倍十福을 가진 말하자면 玉樓夢의 揚昌曲의 八字 아니 後身이라고 할 만 하다. 權門勢道로든지 皇室宗戚의 首班으로든지, 朝鮮 三千里 江山에 뻣첫든 그 뚜렷한 存在(?)로든지, 더구나 特權을 擁衛하고, 牒紙를 돈으로 맨늘기에 유명함으로든지 무엇으로든지 朝鮮의 第一人이요 또 朝鮮만이 가질 獨特하고 偉大하고 光輝(?)잇는 분이다. 韓末政局에 잇서도 그의 行蹟이 만헛고 合倂後에도 그의 「트릭」이 만헛스며, 大院君과 明成后를 끼고 쨔낸 演劇도 氏*의 脚色이엇고, 이 가치 韓末 秘史의 全幅에다 署名捺印을 第一, 二에 치게 된 氏인데. 氏가 公道의 鐵則에 따러 富貴功名頭上에도, 人間公道 웃지하랴, 神仙은 못 보앗다, 天子도 할 수 업다, 落地復生 헛말이라, 不死藥이 어듸 잇노?<65>
맛참내 娑婆世界에, 極貴, 極富를 애처럽게 떠나, 「空手去」를 하게 되자, 다시 京城 뿐 아니라, 三千里 坊坊曲曲에, 또 話題꺼리를 비저 노코 말엇다. 그것은 氏의 最後를 裝飾하랴고 한 子與侄의 勤儉節約이 비저 내노흔 戱曲이 너머나 燦然한 까닭이다. 여기에도 閔大植氏 (그의 寵愛하는 令胤)의 徹頭徹尾한 節約劇이 反映되고 寬大한 處分의 産物인 까닭이다. 却說
一時는 四千萬圓
閔泳徽氏의 總財産은 過去에 얼마이엇스며, 現在에는 어떠케 分布가 되엇는가는 우리가 가장 궁굼하여 하고, 또 가장 알고 십허하는 것이다. 함참 得勢之秋 더구나 平安觀察時代적부터 三千里 江山에서 誠金(?)格으로 글거모흐고, 또 皇室內 幣金을 이리저리 하야 이럭저럭 모혀 노흔 것이, 4,000萬圓이엇고 또 其外에도 中國 上海某外國人銀行에 積立하여 노핫든 것도 수 천만원이엇는데 이것은 閔氏의 名義로 國家公金을 맛겻섯다고 하나 이것의 後日譚을 쓰고저 하는 것이 아님으로 그만두거니와 하여간 氏의 財産으로 世上에 들어난 것은 4,000萬圓이라는 巨大한 富이엇스니 日本內地 財産家에 석겨 보면 住友, 三菱, 三井에는 비길 수 없다 해도 第二流에는 갈만한 處地이엇다. 그러나 現在에 일으러서는 世人이 일커르기를 一千二三百萬圓 程度라 하니, 그 중 2,000餘萬圓은 어듸로 갓는지 氏의 令胤들이 分財하여 잇는 것과 各 事業에 投身하야 損害를 본 것을 除하고 하는 말일지는 모르나 엇잿든 過去에 비하야 半 以上이 줄어든 것은 事實인 것 갓다. 그리고 養子로 들어온 長子 衡植氏의 一時 30萬圓 消費事件 以後로는 그 財産에 대한 世上 評判이 만헛스나 아직도 一千數百萬圓의 財産을 擁하고 잇는 것만은 事實인 것이다. 氏가 生存하엿슬 때에 그 致富術이 영농하엿고, 또 그 守錢術이 남에게 一步를 뛰어낫든 건만은 事實인 만큼, 世人은 氏가 一去하면 그 財産이 어떠케 될 것인가 이모저모로<66> 뜨더가면서, 그 觀測이 區區하엿섯다. 남의 財産이 어듸로 가든지? 어떠케 되든지? 高等政策으로 나아가든지? 그것이 우리 民衆이나, 우리 事業界나, 에 何等 利益을 주고 貢獻을 주지 안는 만큼 關心할 바도 없고 企待할 아모 關聯도 없지만, 自體가 有名하게 모흔 돈이오, 또 일홈 잇는 巨額의 財産인 만큼, 넌즛히 關心을 갓고 또 그 집 家庭의 內容이 普通 우리네와 달나, 大房마마의 直系血孫이 없고, 愛妾마마가 그야말로 八仙女는 됨에 따러 그 血屬이 만흔 만콤, 여기에도 한 가지 興味와 注視와, 分布如何를 疑視하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財産이란 各各 이것을 비밀에 부치고, 掩弊하는 것이어서, 그것을 엿보고, 또 詳細히 알 길이 없는 것이매, 다만 그런 程度의 것이거니 할 뿐이오, 비밀의 비밀이 잇는 만큼 透徹히 알 수는 없으니, 이제 그 大體輪廓만을 공개함에 끄친다.
血屬派閥의 復雜
閔氏 재산의 去就如何를 말하자면, 먼저 閔泳徽氏 家庭의 血屬群像의 列傳을 大槪라도 알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亦是, 閔氏 財産과 가치 복잡다단하며 문외한으로서는 能히 그 체계를 正規할 수 없고 비록 그 집에 2, 3년의 門客 노릇을 하엿다 하여도, 알 길이 없고 譜學의 권위라도 無可奈何의 難事이니 그야말로 重重疊疊한 그집 대문과도 가치 秘藏된 사건이라고나 할까? 閔泳徽氏는 과연 유사 이래로 各 부호가들의 밟은 바 女人界 行程의 水準을 훨신 뛰어나아가, 그의 絶倫한 精力의 입아지된 여인군상이 얼마인지를 헤아릴 수 없는 중, 매일 좌우에 侍立하고, 每夜에 그의 享樂을 위하야 대기하는 여성이 만헛든 만큼, 大房마마를 首位로, 平壤마마, 海州마마를 次席으로 淵堂마마 무슨 마마 하며 5, 6인의 妾室이 各各 駐屯所를 設置하여 가지고 列席하여 게시다. 그럼으로 氏의 그로 인한 因果이든지 大房마마께서는 血屬이 불행히 없고, 平壤마마도 남자로는 없고 오직 列位中에 大福을 가진 海州마마가 삼형제의 아들 大植, 天植, 奎植을 두어 三位一體의 아기자기한 장면을 맨들엇는데. 이 功에는 海州마마가 大勳位을 가저야 한다. 그 뿐 아니라 지금이나 긋때나 어느 때를 勿論하고 閔泳徽氏 집의 權勢와 支配權은 海州마마가 掌握하엿스니, 그것도 生男한 덕분이다. 大房마마는 칠거지악에 無後第一이라는 東洋 獨特의 罪(?)로 上位에는 存在하엿스나, 勢力은 海州마마에게 비길 바 못 되엇다.
閔衡植氏는 嫡孫으로 養子가 되어 들어왓슬 뿐이오, 더구나 溫厚하고 長子의 風이 잇서 疏財淡泊함으로 窮한 사람을 救하고 업는 親戚을 도읍는 말하자면 閔氏家의 전통을 깨트린 反逆兒(?)라는<67> 稱號를 밧게 되엇스니 이로 인하야 저 有名한 30萬圓 消費事件의 發端이 되고 그로부터는 衡植氏는 完全히 去를 當하고 名目만 長子로 잇게 되어 그의 生活은 窘迫한 程度에 잇섯다. 즉 말하자면 閔氏의 堂堂嫡孫으로 그 一權을 掌握할 地位에 잇는 사람이지만 閔泳徽氏에게 信用을 밧지 못하며 去勢를 당한 것이니, 氏의 생각에는 血屬이 더 愛重하고 情이 더 가는 것이매 그럿치 안허도 養子에 대한 觀念이 그리 두텁지 못한 터에, 「돈」을 잘 지키지 못한다고 排擊함도 氏로서는 無理가 없슬 것이다. 그러면 閔泳徽氏의 令子令孃이 都合 幾人인지는 구타여 알 것이 없으나 養子되는 衡植氏를 머리로, 大植, 天植, 奎植 등 三氏와 李定宰氏 夫人, 寡居한 兩位 따님이 잇는데 (其外는 財産關係에 깁픈 關係가 없어 除外) 閔泳徽氏 財産은 이 六位를 싸고 돌며 늘 爭覇戰이 잇섯고, 그 家族別로 角逐이 잇섯든 것이라 한다.
主權은 閔大植氏
血屬으로는 長子이오, 사람으론 가장 信用하고, 守護하기에는 第一節儉하고 애끼기는 누구보다 애틋하고 聰明으로는 諸子 중 一人者라고 指目하는 大植氏는, 閔泳徽氏의 事實上 二世로 自他가 共認하게 되매 모든 權利와, 支配와 處理를 仝氏에게 一任하다 싶히 하엿다. 그럼으로 仝氏는 모든 主權을 掌中에 움켜쥐고 쥘낙필낙 하엿든 것이다. 閔泳徽氏 財産을 직히고, 늘이고, 活用하고, 左右하기는 『大植에게 잇다』고까지 되엇스니 氏는 東一銀行(前 韓一銀行)의 頭取인 同時 閔氏系統에 모든 重要한 자리를 占領하고 그 財産을 守護하고저 八陳圖를 布設하고 잇섯다. 이 守護神은 閔氏王國에 업지 못할 人物이오 엄연한 存在이엇든 것이다. 그럼으로 氏는 늘 一部에서 呑색漢, 깍정이, 안달뱅이. 소리를 들어가며, 그 財産을 마터가지고<68> 잇섯다. 비록 仁寺洞에 阿房宮을 짓고, 郊外에 「스윗홈」을 建設하엿다 하지만 그것은 自身의 위한 自身之策이니까 此限에 不在이다. 엇잿든 日常生活에, 節用節儉은 실로 徹頭徹尾하야, 그 類를 보지 못하겟다는 만큼, 世評이 높지만, 엇잿든 갸륵한 양반이엇섯다. 그런 까닭에 閔氏 王國에서는, 獨裁官이오, 全知全能하고, 暴君이며 主宰者이엇다. 누가 氏의 位를 넘겨다 보며, 누가 氏의 命을 거스릴 것인가? 한아로부터 千百까지 氏가 모르고는 되는 것이 업고, 一粒一系라도 氏의 許諾이 없고서느느 밖으로 나아갈 수 업다. 비록 父敎일지라도, 氏가 반대할 수 있고 氏가 許한 거면 父命도 撤回할 수 잇다. 可謂 莫能當이오, 全權이다. 그 집안에서야 실로 最高獨裁官인 것만은 事實이다.
一部는 法人으로 大部分은 私有
閔泳徽氏가 世上의 *譽*眨을 등지고, 榮爵, 華位, 極貴 極富, 愛子, 寵妾을 다 버리고 一去歸不歸를 한 후 閔氏의 그 巨大한 財産이 果然 어듸로 갓나. 또 어떠한 分布狀態를 보이고 잇는가 함이 이 論의 中心이다. 그러면 閔泳徽 一去 後에 財産은 참말로 어듸로 갓나? 이제 그 側近者의 말과 巷間에 傳播되는 諸說을 綜合하여 紹介하면 이러한 것 갓다.
氏가 生存할 時에 大體의 分配는 정하여 잇섯다 한다. 卽 大體輪廓을 보면, 閔大植氏가 第一 巨大한 分配를 밧고, 그 다음이 閔奎植, 또 그 다음이 閔天植,(死亡) 다음으로는 李定宰 夫人(長女) 또 다음이 出家하엿다가 還元한 따님 끝으로 嗣子 衡植氏의 順位라고 볼 수 잇다 한다. 大植氏로 論하면 血屬으로 長子오 또 海州마마는 生男한 有福한 夫人이라 寵姬의 長子오 主權者오 寵兒이엇든 만큼 閔氏의 財産 중에서 大多分이 그에게로 갓다하야도 疑心할 것도 업고 變怪될 것도 업다. 말하자면 依例 그럿코 宜當 올은 일이다. 사람이란 非凡한 사람이 아닌 以上 血屬에 厚하고 名目만의 形式을 꾸미는 養子에게 薄할 것도 人情에 斯然한 바이라 唯獨 閔泳徽氏에게만 그 範疇 밖에 잇스라는 것은 無理한 일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大植氏로 論하면 生前이나 死後가 問題가 되지 안코 아조 田畓도 「노린자」와 가튼 것 40,000石 現金으로 數百萬圓을 차지하엿고 다음으로 天植(未亡人의 管理)氏가 4萬石의 土地와 數萬圓의 現金을 가젓고 奎植氏가 30,000石 現金 數萬圓, 李定宰氏夫人의 數萬石, 出還令孃이 數千石식을 各各 所持케 되고 其餘 數百 家率은 殘飯式으로 各 數百石, 乃至 數石斗落式을 分配하여 가젓다 한다. 그래서 巨大하기로 有名하든 閔泳徽氏의 集團的 財産이 氏 一去 後에는 分散分布狀態로 변하엿다고 볼 수가 잇다. 물론 이것이 令子令孫까지에는 閔家財閥의 領域을<69> 떠나지 안켓거니와 그럿타고 해도 今後로 一令之下에 左右되고 統制되는 單一財閥의 權能은 發揮하기가 어려울 것만은 事實인 것 갓다.
그러면 그의 嗣孫이오 閔氏 累代 祖上을 떠밧들 宗家 後繼者인 衡植氏에게는 얼마나한 分配가 돌어 갓는가? 그에게는 表面으로는 宗孫이오 宗家이지만, 前日 30萬圓 浪費事件이 말을 하엿는지? 그렷치 안흐면 直系血孫이 아닌 養子가 그로 하야곰 그러케 맨들엇든지 간에 3,000石의 田畓과 校洞住宅 一梀(閔泳徽氏 常住하든 家屋) 밖게 돌어간 것이 업다 한다.
數千萬 長者의 後繼嗣孫으로 內實은 그 가진 바가 얼마 못되니 外富內貧의 가슴 쓰린 씁쓸한 우슴을 우슬 밧게 업슬 것이다. 氏가 血孫이 아니엇든 것이 罪인지? 그럿치 안흐면 30萬圓 浪費事件의 餘震이 未息함이든지 朝鮮舊來의 習慣으로 보아, 너머 分配가 薄하엿다는 것은 避할 길 업다.
그런데 이제 듯는 바에 의하면 閔天植氏의 所持分과 李定宰氏 夫人의 分配와 그 他群小財産을 합하야 法人을 組織하고 一便으로 永保「삘딩」을 經營하며, 기타 諸種權利 機關을 掌理하엿다 하니 그 閔氏 財産은, 分散作用을 하며 다시 一部는 集合體로 되어 잇는 것이다. 原動脉인 閔泳徽氏가 死去하매 그 財産은 各各 細胞로 흘러가는 수 만흔 細脉으로 달려갓다. 兩大靜脉과 極小 部分의 動脉이 橫으로 縱으로 흘너저 가는 것이 閔泳徽氏의 財産이 것는 「코-쓰」이다.
動脉인 閔衡植氏의 心藏이 細微하고, 閔大植, 閔奎植 兩氏의 二大靜脉의 勢力이 縱橫自在한데다가, 大腿脉인 永保 中心의 財閥이 經으로 緯로 휩싸고 도니 果然 이 閔氏의 千數百*圓의 効能이 如何할까. 今後가 注-되는 바이다.
뛰에 들은 餘*
以上 錯綜한 經緯를 錯雜히 써서 一般 讀者는 그 企待가 어그러젓다 하겟거니와 前項에서도 暫記한 바와 가치 全體의 것을 極秘함에 容易히 輪廓이라도 엿보기 어려운 데다가 갈피를 잡기 어려운 閔氏 諸族들의 內密한 것을 뜻대로 알 길이 업서 그럿커니와 이제 그 후들은 餘聞이나 또 한 토막 적고 끗을 맷기로 하자...
閔泳徽氏의 死去 後 葬禮가 너머 疏忽하엿다고 一般이 閔大植氏의 節約劇에 대하야 總攻擊의 화살을 던지자, 그로 인하야 그랫든지 京城府에다가 社會事業에 보태어 쓰라고 그 葬禮費節約한 것 一金 二萬圓也를 寄附하엿다 한다. 그랫더니, 이것을 또 가지고 말 조하는 世人이, 京城府에 寄附한 것 가지고 是是非非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모리 하여도 衡植氏가 30萬圓을 浪費하며<70> 信用을 先人에게 일엇건 말엇건, 宜當히 그 諸弟妹는 宗家오, 嗣孫인 衡植氏에게 配當한 財産이 過小하니, 그 二萬圓을 에게다 주엇스면 돌이어 그 父親의 贖罪나 될 것을....하고 嶮口를 하니까 或 여기에 肝이 좀 찔이든지 閔奎植, 閔天植, 두 누님 합하야 3,000石 직이를 모하 주어라 하고 閔大植氏가 命令을 내렷더니
『閔奎植氏 擧聲大吒曰, 兄님은 一斗落도 아니 내노코 우리더러만 내노흐라는 것은 千不當 萬不當하오』
一矢를 던지자 고만 閔大植氏 無色하며 그 말은 그대로 흐지부지 하엿다니. 내 것은 앗갑고, 남의 것만 내노흐란 廉耻업는 소리를 두 번식 하기 어려운 것은 人之常情이거니와 또 그러면 나도 내놀 것이니, 그러케 하는 것이 올타고 할 閔大植은 아닌지라, 所聞의 所聞만 맨들어 노아, 世上 사람의 심심푸리 話題를 맨들어준 雅量에는 感服할지 몰나도, 3.000石직이 더 으들번 宅인 衡植氏의 今後 處世箋方이나 두고 보기로 하자. 그리고 끗트로 閔氏 財産의 傳統的, 光輝 잇는 그 偉力이 閔氏의 누구의 손으로든지 統制되고 合一되어 그 存在가 어듸까지, 또는 어느 때까지 持續될 與否에 대하야 우리는 注視를 게을지 안키로 하자. (끝)<71><65-71>
[풀영상]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의 잔재 '상당산성 비망록'
1938년 10월01일 삼천리 제10권 제 10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립니다.
閔氏家 悲劇, 一千萬圓 骨肉訴, 沒后 二년 閔泳徽家에 슬픔의 싸홈은 열여 九月二十日 第一回裁判이 서울서 열니다.(돈이냐? 骨肉이냐?)
閔氏家 悲劇, 一千萬圓 骨肉訴, 沒后 二년 閔泳徽家에 슬픔의 싸홈은 열여 九月二十日 第一回裁判이 서울서 열니다.
「子爵」이요, 「조선 갑부」요, 「천만장자」요, 예전 「大匡輔國崇錄大夫」인 「閔泳徽」씨가 2년 전인 昭和 11년에 세상을 떠나자 壽, 富, 貴多 男子하고 그 우에 臥席終身한 그의 일대의 영화는 자못 세상 사람의 이야이 거리가 되었섰다. 그리하야 그 뒤로는 천만원 고개를 넘는 이 큰 재산을 분배하여 가진 여러 자손들이, 모도 다 화목하게 오복을 느리고 잘 사는가 했더니 의외에 오늘 즉 閔자작 작고 후 2년을 넘지 못한 오늘에 재산 분배를 정당하게 하자 하여 돈을 싸고 형제끼리 법정에서 싸우는 人世最克의 골육상쟁전이 개막되었다. 그것은 종가를 직히는, 장자 閔衡植이 차자인 閔大植과 삼자인 閔奎植을 걸고 京城 지방법원에
「유산」전부의 신탁을 해제하고 분배 정리를 하게 하여 달나는 제소이다. 이리하야 閔씨 일족의 비극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면 대체<49> 閔씨 재산은 얼마나 되며 그 3형제의 혈연관계는 어떻게 되었으며 유산은 어떻게 분배되었기에 여기에 또 말성이 되었든가 그를 차례 차례로 따져 보기로 하리라.
臨終時 財産 一千二百萬圓
閔泳徽씨의 총재산은 얼마나 되었든고. 三夌, 三井이 몇억원 대라 하고 미국의 카-네기나 로스촤일드가 수십억, 수백억이라 하니 조선 갑부일 적에는 그와 억개를 겨늘 수 있었슬고. 그러나 누구나 짐작하기에 그러치는 못했을 터이다. 그러면 근년에 금광을 파라 부자된 이가 많어서 曰 崔昌學이 었저니 曰 李鍾萬이 었저느니 하여 여러 백만원의 부자가 수두룩하게 배출하는 판에 閔씨는 그러면 이 새부자들보다 못한 재산가었든가 하리라. 그러나 그, 또한 그러치 않었든 모양으로 무에 무에해도 조선서는 고금 몇백년 내에 처음보는 큰 부자였든 듯 하야 그의 임종시의 총재산이 혹은 3천만원 혹은 2천만원이라고 호가하는 터인데 확실한 측의 조사에 의하면 1천2백만원 정도가 과히 과부족이 없슬 액수였다고 한다.
그야 上海 무슨 외국 은행에 저금한 돈이 있느니 內地 무슨 회사에 비밀히 투자한 돈이 있느니 하고 있는 풍설 없는 풍설 자자하였으나 그를 었지 다 귀담어 드르랴.
氏의 재산의 대부분은 부동산 즉 토지였다. 토지에서만 나는 추수 8만석 이라니 그 8만석 이란 것도 13도를 도라다니며 골느고 골나서 차지한 沃土良田에서 나는 쌀이라
土地만 約一千萬圓을 본다.
그밖에
東一銀行 其他 株券 約壹百萬圓
慶雲町의 궁궐같은 大家와 嘉會町의 아방궁 같은 별장과 그밖에 무엇무엇이 것이 약1백만원이리하야 1천2백만원을 쳤든 것이다. 토지는 팔도에 널너저 있는 것 외에도 서울 鐘路 부근에도 만했다. 그 일례를 드러불가
鐘路 2 丁目 13垈 93 평
종로 13 정목 2대 34 평
典農町 970 평
典農町 973 평
花洞町 37 평
花洞町 47 평
花洞町 39 평
花洞町 57 평
花洞町 48 평
토지라 함은 팔도 강산 해 뜨고 흙 있는<50> 데 치고 없는 곳 없어 그 중 몇 고을 것을 헤이면
忠南 唐津, 黃海 平山, 京城 廣州, 忠南, 扶餘, 忠北 靑陽, 洪川, 江原 春川, 報恩, 舒川 등 등등.
血屬派閥이 複雜無比
그 다음 고소한 閔衡植은 엇든 사람이고 고소 밧은 閔大植은 어떤 사람들인고. 도대체 그 집 혈통관계는 어떠코 족보는 어떻게 되었는고.
그 집 가정의 내용은 보통 우리네와 달나 大房마마의 직계 혈손이 없고 愛妾마마가 그야말로 여러분이 됨에 따러 그 혈속이 많은 만큼 여기에도 한 가지 흥미와 주시와 분포 여하를 疑視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閔씨 재산의 거취 여하를 말하자면 먼저 閔泳徽씨 가정의 혈속 군상의 列傳을 대개라도 알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閔씨 재산과 같이 복잡다단하여 문외한으로서는 능히 그 체계를 正視할 수 없고 비록 그 집에 2,3년의 문객 노릇을 하였다 하여도 알 길이 없고 譜學의 권위라도 無可奈何의 난사이니 그야말로 重重疊疊한 그 집 대문과도 같이 비장된 사건이라고나 할까? 閔泳徽씨는 여성이 많었든 만큼 대방마마를 수위로 平壤마마, 海州마마를 차석으로 淵堂마마, 무슨 마마하여 5,6인의 첩실이 각각 주둔소를 설치하여 가지고 열좌하여 게시다. 그러므로 氏의 그로 인한 인과이든지 대방마마께서는 혈속이 불행히 업고 平壤마마도 남자로는 없고 오직 列中에 대복을 가진 海州마마가 3형제의 아들 大植, 天植, 奎植을 두어 삼위일체의 아기자기한 장면을 맨들엇는데 이 공에는 海州마마가 大勳位을 가저야 한다. 그뿐 아니라 지금이나 그때나 어느 때를 물론하고 閔泳徽씨 집의 권세와 지배권은 海州마마가 장악하였으니 그것도 생남한 덕분이다. 대방마마는 七去之惡에 無後第一이라는 동양 독특의 죄로 상위에는 존재하였으나 세력은 海州마마에게 비길 바 못되었다.
閔衡植씨는 嫡孫으로 양자가 되어 들어왔을 뿐이오, 더구나 온후하고 장자의 風이 있어 䟽財淡泊함으로 궁한 사람을 구하고 업는 친척을 도읍는 말하자면 閔氏家의 전통을 깨트린 반역아(?)라는 칭호를 밧게 되었으니 이로 인하야 저 유명한 30만원 소비사건의 발단이 되고 그로부터 衡植氏는 완전히 거세를 당하고 명목만 장자로 있게 되어 그의 생활은 궁핍한 정도에 있었다. 즉 말하자면 閔씨의 당당 적손으로 그 일권을 장악할 지위에 있는 사람이지만 閔泳徽씨에게<51> 신용을 밧지 못하여 거세를 당한 것이니 氏의 생각에는 혈속이 더 애중하고 정이 더 가는 것이매 그렇치 않어도 양자에 대한 관념이 그리 두텁지 못한 터에 「돈」을 잘 지키지 못한다고 배격함도 氏로서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閔泳徽씨의 令子 令孃이 都合幾人인지는 구타여 알 것이 없으나 양자되는 衡植씨를 머리로 大植, 天植, 奎植 등 3씨와 李定宰씨 부인, 寡居한 兩位 따님이 있는데 (그 외는 재산 관계에 깊은 관계가 없어 제외) 閔泳徽씨 재산은 이 6位를 싸고돌며 늘 쟁패전이 있었고 그 가족별로 각축이 있었든 것이다.
主權은 閔大植氏
혈속으로는 장자이오, 사람으로 가장 신용하고 수호하기에는 제일 節儉하고 애끼기는 누구보다 애틋하고 총명으로는 諸子 중 일인자라고 지목하는 大植씨는 閔泳徽씨의 사실상 2세로 자타가 공인하게 되매 모든 권리와 지배와 처리를 동씨에게 일임하다 싶이 하였다. 그러므로 동씨는 모든 주권을 掌中에 움켜쥐고 쥘낙 필낙하였든 것이다. 閔泳徽씨 재산을 직히고 늘이고 활용하고 좌우하기는 「大植에게 있다」고 까지 되었으니 氏 東一銀行(전 韓一銀行)의 頭取인 동시 閔씨 계통에 모든 중요한 자리를 점령하고 그 재산을 수호하고저 八陣圖를 布設하고 있었다. 이 수호신은 閔씨 왕국에 없지 못할 인물이오, 엄연한 존재이었든 것이다. 그러므로 氏는 늘 일부에서 吝색漢, 깍정이 안달뱅이 소리를 들어가며 그 재산을 마터가지고 있었다. 비록 仁寺洞에 아방궁을 짓고 교외에「스윗홈」을 건설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自身之策이니까 此限에 不在이다. 었쨋든 일상생활에 節用節儉은 실로 철두철미하야 그 류를 보지 못하겠다는만큼 세평이 높지만, 엇쨋든 갸륵한 양반이었었다. 그런 까닭에 閔씨 왕국에서는 독재관이오, 전지전능하고 폭군이며 주재자이었다. 누가 氏의 位를 넘겨다보며 누가 氏의 명을 거스릴 것인가? 한아로부터 千百까지 氏가 모르고는 되는 것이 업고 一粒一絲라도 氏의 허락이 없고서는 밖으로 나아갈 수 없다. 비록 父敎일지라도 氏가 반대할 수 있고 氏가 허락한 거면 父命도 철회할 수 있다. 可謂 能當이오, 전권이다. 그 집안에서야 실로 최고 독재관인 것만은 사실이다.
一部는 法人으로 大部分은 私有
閔泳徽씨가 세상의 懷譽褒貶을 등지고, 榮爵, 華位, 極貴, 愛子, 寵妾을 다 버리고 一去歸不歸를 한 후 閔씨의 그 거대한 재산이 과연 어듸로 갓나 또 어떠한 분포 狀態를 보이고 있는가. 그러면 閔泳徽 一去後에 재산을 참말로 어듸로 갓나. 이제 그 측근자의 말과 항간의 전파되는 諸說을 종합하여<52> 소개하면 이러한 것 갓다.
氏가 생존할 시에 대체의 분배는 정하여 있었다 한다. 즉 대체 윤곽을 보면 閔大植씨가 제일 거대한 분배를 밧고 그 다음이 閔奎植, 또 그 다음이 閔天植(사망), 다음으로는 李定宰氏 부인 장녀, 또 다음이 출가하였다가 還元한 따님, 끝으로 嗣子 衡植씨의 순위라고 볼 수 있다 한다. 大植씨로 논하면 혈속으로 장자오, 또 海州마마는 생남한 유복한 부인이라, 총비의 장자오, 주권자오, 총아이었든 만큼 閔씨의 재산 중에서 大多分이 그에게로 갓다하야도 의심할 것도 업고 변괴될 것도 없다. 말하자면 의례 그렇 일이다.
사람이란 비범한 사람이 아닌 이상 혈속에 후하고 명목만의 형식을 꾸미는 양자에게 박할 것도 인정에 斯然한 바이라 유독 閔泳徽씨에게만 그 범주 밖에 있으라는 것은 무리한 일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大植씨로 논하면 생전이나 사후가 문제가 되지 않고 아조 전답도 「노린자」와 같은 것 4만석, 현금으로 수백만원을 차지하였고, 다음으로 天植(미망인이 관리)씨가 4만석의 토지와 수만원의 현금을 가졌고 奎植씨가 3만석, 현금 1만원, 李定宰씨 부인의 수만석, 出還令孃이 수천석 식을 각각 소지케되고 其餘 수백가솔은 殘飯식으로 각 수백석, 내지 수석 斗落식을 분배하여 가졌다 한다. 그래서 거대하기로 유명하든 閔泳徽씨의 집단적 재산이 氏 一去後에는 분산 분포 狀態로 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영자 영손까지에는 閔가 재벌의 영역을 떠나지 안켓거니와 그렇다고 해도 금후로 一令之下에 좌우되고 통제되는 단일 재벌의 권능은 발휘하기가 어려울 것만은 사실인 것 갓다.
그러면 그 당시 그의 嗣孫이오, 閔씨 누대 조상을 떠밧들 종가요, 繼者인 衡植씨에게는 얼마나 한 분배가 돌어갓는가. 그에게는 표면으로는 종손이오, 종가이지만 직손 혈손이 아닌 양자가 그로 하야금 그렇게 맨들었든지 간에 3천석의 전답과 교동 주택 1동(閔泳徽씨 상주하든 가옥) 밖에 돌어간 것이 업다 한다. 수 천만 장자의 후계사손으로 내실은 그 가진 바가 얼마 못되니 外富內貧의 가슴 쓰린 씁쓸한 우슴을 우슬 밧게 없을 것이다. 氏가 혈손이 아니었든 것이 죄인지, 그렀치 않으면 조선 구래의 습관으로 보아 너머 분배가 박하였다는 것은 세인이 다 하든 말이다.
閔泳徽氏의 蓄財史
- 訴狀에 나타난 고소 이유 -
원고는 故민영휘자작의 양자로 피고 등은 자작의 서자남(庶子男)이다. 민영휘자작은 이조 역대의 명문으로 이태왕(李太王)의 중신인 민두호(閔斗鎬)<53> 장남으로 태여나 명치 11년 당년 일곱 살에 문과에 급제, 동 15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동 20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어서 가의대부(嘉義大夫), 동 23년에 자헌대부(慈憲大夫), 이어서 숭정대부(崇政大夫), 동 27년에 숭록대부(崇祿大夫) 동 28년에
보국(補國)에 누진하고 그 해에 중추원 의장, 동 32년에 장례원경(掌禮院卿), 동 35년에 육군 부장, 동년에 헌병대 사령관, 동 39년에 시종원경 겸 내대신, 동 40년에 내대신을 역임하고 일한합병의 공에 의하야 자작이 되였는데 본처인 신씨(申氏)와 사히에는 자녀가 없어 명치 14년 3월 15일 원고를 양자로 하고 곳 입적시킨 후, 그 후 소실 안씨(安氏)와 간에 명치 15년 7월 9일 피고 대식을 나코 동 21년 9월 30일 피고 규식을 나었다. 그런데 민자작은 원고로 하여금 관게에 나서게 하고
피고들로 하여금 실업에 종사하도록 명령하였으므로 원고는 그 의사에 따라 한학을 공부한 결과 명치 25년 문과에 급제하고 동 30년에 통정대부, 동32년에 가선대부에 승진하고 동 35년에 평안북도 관찰사, 동 36년에 경상남도 관찰사, 동 37년에 의정부삼찬(議政府參贊), 동 38년에 법부협판(法部協判), 동39년에 학부협판(學部協判), 대정 13년에 중추원 참의를 역임, 소화 10년 12월 31일 고 민영휘 자작의 사망으로 가독(家督)을 상속하였다고. 민영휘자작은 생전에 중요한 관직을 역임하는 한편, 또 축재(蓄財)에 비상한 노력을 다하야 일한합병 당시에 벌서 년수입 소작료 벼 5만여 석이나 되는 전답 외에 경성부 내에 있는 토지가 가옥으로서 시까 1백만원 이상에 달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자본금 1백만원의 한일은행(韓一 銀行)을 설립한 외에 일한합병의 공에 의하야 은사금 수십만원을 바닷는데 일즉이 통감부 재판소(統監府 裁判所)가 설치되자 민씨가의 재산은
관권을 이용하야 불법한 축재를 한 것이라고 세평이 험악할 뿐 아니라 재산을 반환하여 달라고 하는 사람까지 다수 있으므로 민영휘는 일체의 재산을 자기의 소유 명의로 함을 피하고자 하였다. 원고는 원래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을 뜻으로 하고 전혀 서도(書道)와 문학을 수학하였고 이에 반하야 피고들은 당초부터 은행의 업무 기타 재게에 종사를 하고 있었던 관게상 조선토지조사령에 의한 토지신고를 할 때 부동산에 대하야는 거의 다 피고들에게 신탁하고 동인 명의로 신고를 하여 사정(査定)을 받었으며 은행의 주식도 피고들의 명의고 신탁하고 또 선대 자신이 총재산을 관리하고 수익한 금액으로써 이후 매수한 부동산도 전부 피고 등과 피고 대식의 장남 병수(丙壽), 이남 병도(丙燾) 등에게 신탁하고 동인 등의 명의로 소유권 이전<54> 등기를 받었으나 소화 6년 3월 중 당년 80세의 노령으로 동맥경화증에 걸이여 점점 신체가 쇠약하며 정신이 몽농하야 소화 7년 3월 중 부터 언어불능, 정신혼명 상태에 빠졎으므로 당시에 총재산인 연수입 소작료 벼 8만여석이나 되는 토지와 경성부내에 소재한 부동산 시가 2백만원 이상에 달하는 것과 기타 1백만원의 주식을 소유하면서도 피고 기타 친족에 대한
분재도 하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므로 원고는 선대 2주년의 상기를 치른 후 재산관리를 위하야 피고들에게 총재산의 관리를 일임하기로 작정하고 장남 병주(丙疇)로 하여금 피고들로부터 수시로 수익금 중에서 일부 반환을 바더가지고 가게(家計)의 지출을 하도록 하였드니 피고 등은 병주에게 수익금의 일부 반환을 줄 때 마다 차용증서를 제시하고 날인(捺印)하기를 강요하였다. 이야기를 드른 원고는 이상히 생각은 하여왔으나 은인자중하야 선친의 상기(喪期)가 끝나기를 기다려 소화 13년 3월에 이르러 피고들에게 대해서 선친의 유산인 전기 부동산 及 동산의 신탁을 해제하고 적당히 분배 정리할 것을 표시하였더니 피고 등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우금것 응하지 안흘 뿐 아니라
수익(收益)의 반환조차 거절하므로 부득이 위선 피고 민대식에 대하야 신탁부동산의 일부와 피고 민규식에 대하야도 신탁부동산의 일부를 각각 신탁해제로 인(因)한 소유권이전등기수속의 이행을 구하고저 본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餘錄片片
오늘은 骨肉相爭을 법정에 보이고 잇지만은 그 자손들도 선대의 힘으로 소시쩍 人世의 榮榮도 잘 누렸으니 맞아들 閔衡植씨는 27에 평안감사를 하였고, 둘재아들 閔大植씨는 17세 小童철에 이미 승지 벼슬을 하였다.
慶雲町 천도교당 뒤에 있는 閔泳徽씨 집은 녯날 육군참령 李甲씨가, 夜半에 뛰어들어가 위협하여 돈을 내어다가 五星學校를 지었다 하여 유명한 집터이다.
더구나 그 집터로 말하면 예전은 영의정으로 그 세도가 飛鳥走獸라도 쩔쩔매게하든 金炳基의 사든집으로 진실로 이 집은 역사의 어느 일면을 이약이하든 터전이다.
고 閔자작은 합병 당시 일시 賜金 10만원을 받었었다 한다.
이 재판의 원고측 변호사는 辛泰獄, 金炳魯, 李仁 등 4氏로 피고측은 아마 李升雨씨 몇 분이 될 듯하다는데 公判은 9월 20일 개정하리라 한다. 화해가 아니되고 끗끗내 법정에서 흑백을 가리게 된다면 복잡다단한 사건이니만치 상당히 세월을 끄을니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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