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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성면 갈산리 추봉영당(琅城面 葛山里 楸峰影堂)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낭성면 갈산리 추봉영당(琅城面 葛山里 楸峰影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3. 13. 12:28

 

 

낭성면 갈산리에 있는 추봉영당입니다. 추봉영당에는 오저(吳著)공을 모시고 있습니다. 오저공은 금암 오숙선생의 증손이며 조부는 증 호조참판 필창(必昌) 부친은 증 호조판서 도명(道明)이다. 공은 어려서 일찍 모친을 여의웠으나 부친이 키웠다. 어려서 부터 중년에 이르기 까지 학문에 뜻을 두고 글읽기에 전념하여 사서삼경을 익히고 생활이 쪼들려도 학문에 전념하여 44세 되던 해인 1756년(영조 32년)병자년 식년시에 병과에 급제하였다.

 

 

 

이 후 숭문원정자 예조좌랑 경상도사 사헌부 지평 정언 장령 군자감정등을 거치며 공직에 있으면서 본가 왕래시에도 봉록이외에는 국고금을 쓰지 않았으며 청렴하고 주변을 깨끗히 하는 등의 모범을 보였으며 얼마 후 고향 갈산으로 낙향하여 추봉이라 호를 지어 후학에 힘쓰시다 계미년에 사한부정언으로 배명되었으나 사임하였으며 을유년에 돈녕 도정으로 배명되고 경술년에 가선대부가 되어  한성부좌윤이 되고 1794년 갑인년에 자헌대부가 되어 지중추부지사로 기지(基址)에 입록(入祿)되시었다. 이에 나라에서 삼대에 걸친 관직 추증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추봉영당은 오저공을 모신 영당으로 1870년(고종9년) 청주목 낭성면 갈산리 소암마을에 세워졌던 것을 1985년 백호마을로 이전 복원하여 매년 9월9일에 향사하고 있으며 이곳의 추봉영정은 가로45센티 세로 68센티로 그린 영정으로 그린 화가와 제작연대는 미상이다. [2014년 낭성면지]

 

 

 

오저(1713년(숙종 39) ~ 1794년(정조 18) )는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근보(謹甫), 호는 추봉(楸峰). 서윤(庶尹) 오숙(吳潚)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필창(吳必昌)이고, 아버지는 증호조판서 오도명(吳道明)이다. 어머니는 채훈서(蔡勳瑞)의 딸이다. 1756년(영조 3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고, 1762년 숭릉별검(崇陵別檢), 1764년 전적(典籍)을 거쳐, 이듬해 예조좌랑에 올랐다. 1774년 병조정랑을 거쳐 장령(掌令)이 되어 돈녕부의 기강을 바로잡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지평(持平), 통례원(通禮院)의 우통례, 장령을 두루 역임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장령으로 대망(臺望)의 일을 맡았다가 이조판서 이중우(李重祐)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으나, 다시 성균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80년에 군자감정을 거쳐 외직인 성환찰방을 지내다 사임하고, 청원군 낭성면 갈산리에 귀향하였다.

1783년 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787년 장령으로 있으면서, 기호 지방에 흉년이 들었으므로 구휼할 것을 상소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1789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공조참의·돈녕도정(敦寧都正)을 역임하였다.

1790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한성부좌윤을 거쳐 1794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고, 지중추부사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오저 [吳著]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추보영당이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