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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성면 현암리 신득치묘비(琅城面 玄岩里 申得治墓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낭성면 현암리 신득치묘비(琅城面 玄岩里 申得治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4. 25. 12:55

 

 

청주쪽에서 현암리 쪽으로 가다보면 현암리 못미쳐 좌측 야산에 자리하고 있는 묘소가 있습니다. 통정대부로 이조참의에 증직된 고령인 신득치의 묘소입니다. 무덤은 호석을 둘렀으며 문인석과 망주석이 후보되어 있습니다. 신,구비석이 있으며 신비에 새겨진 내용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부군의 휘는 득치(1592-1656)요 자는 평보다. 신씨는 고령에서 나왔는데 멀리 선대의 차레는 고려때 휘 성용이 비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이 일어섰다. 관직이 검기군기감이다. 사세를 지나 예의에 이르러 판서가 되었다. 휘 덕린이 절개와 충의가 뛰어나 그 가문을 이어서 열었으며 또 사세에 이르러 본 조정 조선에 영의정 문충공 휘 숙주가 삼대조에 걸쳐 재상을 했으며 네 종의 공훈에 책봉되어 더욱 빛났다. 문충공이 내자사정을 낳으니 우의정에 추증되고 휘 동이 부군과 왕세조가 된다. 고조는 휘가 가선이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연산군시에 관직을 포기하고 청주향장으로 귀향하여 돌아가시니 묵정에 장례지내 자손이 이로 인하여 집짓고 살았다.

 

 

 

 

 

증조는 휘가 서이며 은덕으로 일찍 하세하니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휘가 중엄이니 동지중추부사이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아버지는 휘가 용이니 황해도 관찰사이며 이조참판서에 추증되었다. 비는 정부인 전의이씨이다.고려태사 이탁의 후손으로 이조참판 휘 문형의 딸이다.집안이 대대로유학과 사장을 익혀 연이어 구세에 과거에 합격했으며 큰 벼슬에 이르렀다. 부근은 소싯적부터 얽매이지 않아 유독 세속과 더불은 일은 하지 않았다. 밭갈이 하고 수확하는 일을 하고 벼슬을 즐겨하지 않았다. 갑자년에 판서공을 따라 공주에서 고삐를 잡고서 역적을 평정했다. 조정에서 과거장을 개설하여 공로를 보상하려 했으나 부군은 나아가지 않고 돌아와 봉암의 산천을 사랑하여 작은정자를 짓고 정자의 편액을 낙우라 하고 물고기 잡기와 산짐승 잡기에 의착하여 생애를 마쳤다.

 

 

 

 

부군은 형제중에 셋째로 12살에 모부인의 상을 당했는데 상복을 입는것이 성인과 같았다. 판서공은 예학을 좋아하고 의가 바야흐로 의가 매우 신칙하여 부근이 가정을 적시고 물들이며 효도와 공경을 돈식히 행해 일찌기 자제들이 넘지를 못했다.판서공이 상을 당하여 백형과 중형 양공이 먼저 이미 하세하니 부군이 두아우와 더불어 덕수묘옆에 움막을 짓고 집례를 다하여 판서공이 시묘살이 할 때에 고사를 한결같이 따랐다. 날마다 성묘하여 풍우 매우심하면 혹 묘의 계단아래로 옮겼는데 장마가 져 웅덩이가 생긴곳이 남아있어 부군이 여러 아우들과 더불어 각각 작은 보자기를 가지고 흙을 담아 그 가운데 쏟아 붓는것이 날마다 일상이 되었는데 3년이 안되어 웅덩이가 채워져 묘도에 의물을 설치하는데 힘을 다해 공사를 맡아 친히 규도를 내려주고 봉분의 장식을 하는데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 상복을 벗고 계모 홍씨를 받들고 남으로 돌아와 더욱 섬기고 봉양하는 방도를 부지런 하게했다.

 

 

 

 

부군이 바야흐로 엄격하게 하여 국도가 있으며 평소 생활할 때 말과 웃음이 적고 교만하고 허식을 끊어 집안을 풍요럽게 하였으며 덕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고 의로운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여 비록 창고에 곡식을 내고 전의를 후하게 내어 인색하게 하는바가 없었으며 친척들에게도 화목하게 하고 거친 도적에게도 남겨주어 그 살아가는 이치를 경영하는데 이르러 사람들과 사귀어 끼고 드는것을 물리쳤으며 한결같이 성신으로 말하는것을 좋아했으며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상을 차려 은근히 대접했으며 야박하게 하거나 후하게 하지 않았다. 만년에 활쏘기를 좋아했으며 향인들과 더불어 결사하여 날을 보냈다. 전옹과 야노가 쟁석에 찾아오면 유유히 더불어 함께 그 환심을 얻어 따르는 사람이 애모하고 기뻐하고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부군이 병환이 나자 날마다 문에서 기다리나 마침내 돌아가셨다.서로 이끌고 찾아와서 곡을 하는데 마치 그 친척에 대해 곡을 하는것 같았다. 부군은 만력 임진년(1592년) 9월초 6일에 태어나 병신년(1656년) 7월 27일에 육십오세에 독감으로 돌아가셔 겨울 12월 을유에 상당성하 현암 임좌의 언덕에 장례지냈다. 전비 공인은 종실 온영군의 후예로 이기의 딸이다. 경인년(1590)12월 14일에 태어나 1613년 부군에게 시집와 기미년(1619년)에 돌아가시니 연세 삼십이라 기일이 부군과 같다.딸 하나를 낳으니 생원 안윤행에게 시집을 갔다.후비 공인 단양우씨는 국초의 명신 우희열의 후예로 공조좌랑 우극근의 딸이다. 신축년(1601)12월 29일에 태어나 신유년 부군에게 시집와서 아들 하나를 낳으니 즉 나의 선고 휘 집이다.공인은 겸손하고 공손하며 온유하고 가상하여 자애심과 효심이 돈독하여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모두 그 마땅함을 터득하여 멀리까지 헤아리는 점이 있었다. 증손과 현손이 앞에 많아 향방이 그 경사를 칭송했다. 공이 하세후 이십칠년에 수명 팔십이세로 돌아가시니 임술년(1682)정월 심칠일이다.절명에 임하여 오히려 정신이 맑아 선군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내 나이가 이미 높은데 다시 무슨 유감이 있겠는고? 곧바로 너는 굳고 굳게하여 내가 죽거든 너는 제도를 지켜 예전의 상례때와 같이 하고 내 눈이 밝지 못하고 또 너희가 지내는 제사를 흠향하지 못할것이라고 순순히 말을 거듭하였다. 여러 자부들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고 분명히 평일같이 했다. 이에 3월 25일 계유의 부근묘의 오른쪽에 붙여 장례지냈다. 이씨의 묘는 묵정 선영아래 있는데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어도 천장하지 못했다. 생원은 육녀를 낳았는데 현감 정동용 사인 이간 참봉 송석필 사인 김대석 진사 이저 사인 홍만해가 그 사위이다. 선고는 팔남삼녀를 낳았으니 필원은 을유년에 생원에 합격하고 필청은 갑자년에 정원에 장원을 했다.필징 필혼 필성 필연 필렴 필양이다.딸은 진사 유문도에게 시집 갔으며 아들은 광린 광인 광한이다.이 한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만흥이다.송석필을 삼남이녀를 낳랐다.장남은 이붕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이저는 일남일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정보이다. 홍만해는 이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필원은 일남이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택이며 첫딸은 정태서에게 시집갔다. 필청은 사남일녀를 낳았는데 ......

 

신비석은 1997년 10월에 건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