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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조득림유애불망비(公山城 趙得林遺愛不忘碑) 본문

전국방방곡곡/공주(公州)

공산성 조득림유애불망비(公山城 趙得林遺愛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2. 8. 8. 17:30

 

공산성 선정비군에 자리하고 있는 양주인 조득림의 영세불망비입니다.비석의 전면에는 조순상득림유애불망비(趙巡相得林遺愛不忘碑)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조득림은 조선후기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입니다.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덕경(德卿). 조제만(趙濟晩)의 아들이다.1831년(순조 31) 진사로서 식년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837년(헌종 3) 부교리를 지냈다. 그 뒤 영변부사를 거쳐 1846년 평안도암행어사 박영보(朴永甫)의 서계에 의하여 부사로서의 실정이 인정되어 치죄되었다.
1848년에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1853년(철종 4)에는 호군으로 종묘친제시(宗廟親祭時) 독옥책관(讀玉冊官)이 되었다. 1855년 형조판서·대호군이 되었고, 동지사의 정사로 청나라에도 다녀왔다. 이듬해 한성부판윤을 거쳐 공조판서를 지내고 대호군으로서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에 임명되었다.
1858년 판의금부사가 된 이후 고종대까지 걸쳐 여러 차례 이 직위를 중임하였고, 이어 1861년에는 예조와 형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삼정(三政)의 문란과 관리의 탐학에 대한 반발로 민란이 발생하자, 박규수(朴珪壽)의 건의로 이정청(釐整廳)이 설치되었는데, 이때 상호군으로서 당상에 임명되어 삼정개혁에 힘썼다.
철종 사후에는 국장도감(國葬都監)에서 표석음기서사관(表石陰記書寫官)을 맡았고, 고종 즉위 후 공조판서·이조판서·한성부판윤·홍문관제학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실록사(實錄事)로 실록편찬에도 참가하였다. 1866년에는 예문관제학으로 고종이 대사면령을 내렸을 때 반포한 교문(敎文)을 제술하였고, 이해 형조판서 및 공조판서를 지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득림(趙得林))]

 

 

 

 

순상(巡相)이라 함은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임금의 명()을 받고 사신(使臣)으로 나가는 재상(宰相)의 종이품(從二品) 임시(臨時) 벼슬을 칭합니다.

 

조득림은 1848년에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각 고을에 재해를 입은 민가에 휼전하였다.1850년에는 충청도에서 탄일물선(誕日物膳)으로 올린 생전복이 거의 상하였다는 이유로 봉진관을 파직하면서 감사 조득림도 책일을 지게 하였다는 대목이 "일성록"에 기술되어 있다.

또한 "철종실록"에는 1851년 충청우도 암행어사 김유연이 전 충청감사 조득림등에게 죄 줄것을 청하는 기사가 있다. 그에 따라 의금부에서 심문하였다.

 

暗行御史가 죄상을 보고한 前 忠淸監司 趙得林을 廟堂에서 稟處하게 할 것을 청하는 吏曹의 啓目  
철종 2년 1851년 04월05일(음)
◯ 이조 계목점련(吏曹啓目粘連)에
“계하(啓下)하셨습니다. 이 충청우도(忠淸右道) 암행어사 김유연(金有淵)의 서계(書啓)를 보니, ‘운운(云云).’ 하였습니다. 전 감사(前監司) 조득림(趙得林)은 암행어사의 서계에 열거된 내용이 숱하게 많으나 도신의 체모(體貌)가 중하여 본조(本曹)에서는 감히 순례(循例)로 논단(論斷)하지 못하니, 묘당에서 품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회계(回啓)한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