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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평면 용정리 쌍오비각(草坪面 龍亭里 雙梧碑閣) 본문
이대건과 이시발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는 쌍오비각이 자리한 용정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용소(龍沼)의 ‘용(龍)’자와 쌍오정(双悟亭)의 ‘정(亭)’자를 따서 용정리(龍亭里)라 하였다. 조선 말기 진천군 초평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양촌리·지전리·부창리·생석리·연촌리를 병합하여 용정리라 하고 초평면에 편입하였다. ] 동남쪽으로 두타산(頭陀山)[598m]이 솟아 있고, 초평천(草坪川)이 마을 중앙에서 남서쪽으로 흘러 초평저수지로 흘러든다. 기후가 온난하고 수량이 풍부하다. 진천군청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져 있다. 자연마을로 생곡·부창·양촌·지전 등이 있으며, 국도 34호선이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어 증평군과 이어지고, 지방도 516호선이 동북 방향으로 뻗어 있어 국도 21호선과 만난다. 주요 농산물로 쌀·마늘·고추·잎담배가 재배된다. 문화재로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인 진천 이시발 신도비(李時發神道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1호인 진천 태화 4년명 마애여래입상이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이대건의 신도비. 이대건(李大建)의 본관은 경주로, 고려 후기 유학자로 명성이 드높았던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나 25세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아들이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이시발(李時發)이다. 이시발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 박춘무(朴春茂)를 따라 공을 세운 데 이어 1596년(선조 29)에는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고, 1624년(인조 2) 체찰부사로서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자 조정에서 아버지인 이대건에게 의정부좌찬성을 추증하였다. 이에 경주이씨 문중에서 1658년(효종 9) 이대건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진천에서 국도 34호선을 따라 증평 방향으로 가다가 초평농공단지를 지나면 초평면 용정리가 나온다. 이대건 신도비는 마을 안에 아들 이시발 신도비와 함께 ‘쌍오비각’이라고 편액한 보호각 안에 세워져 있다. 방형 대석 위에 높이 150㎝, 너비 85㎝, 두께 25㎝의 오석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렸다. 이수의 앞면은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이며, 뒷면에는 여의주를 잡고 있는 한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대좌의 앞면은 둘로 구분하여 인동과 연화문을 새겼다. ] 비의 앞면에 ‘증이조판서성균진사이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成均進士李公神道碑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알 수 없으며, 글씨는 최입공이 썼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번역문> 조선국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성균관진사 이대건李大建신도비명 병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최립崔岦지음. 손자 통훈대부 행이조정랑 지제교 겸 세자시강원문학 교서관교리 한학교수 이경휘李慶徽 글씨.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이정영李正英전서篆書. 공의 이름은 대건大建이고 자는 여립汝立이며 경주 이씨이다. 시조인 이인 알평謁平이 표 암瓠巖에서 태어나 신라의 개국을 실질적으로 보좌하여 대대로 명문이 되었다. 고려 말에 문하시중 문충공文忠公이제현李齊賢이 덕업과 문장으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익재益齋선생이라고 부른다. 공에게는 10대조가 된다. 이조에 들어와서는 6대조 이윤인李尹仁이 관찰사를 지냈고, 고조 이공린李公麟이 무반으로 관직에 나와 현령에 이르렀 다. 증조 이원李黿은 예조좌랑을 지냈으며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김한훤金寒暄(김굉필)과 함께 한때 점필재佔畢齋(김종직)의 문하에 있었으므로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탁영金濯纓(김 일손)과 함께 죄를 얻고, 갑자년의 옥사 때 사망했다. 나중에 죄가 씻겨 도승지에 추증되 었다. 남추강南秋江(남효온)의 『사우록師友錄』에 그 행적이 드러나 있다. 조부 이발李渤은 좌 통례를 지냈다. 조부 이하는 지금 관찰사로 있는 공의 맏아들이 귀하게 되어 추은推恩을 받 았다. 이발은 이원의 동생 생원 이민李黽의 후사를 이었다. 집안이 화를 당한 끝에 형제들 이 지방의 농장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제천提川의 집안은 이민부터 시작되었는데, 기개와 절개로도 유명했다. 아버지 이경윤李憬胤은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원주 이씨原州李氏 는 병절교위 이은李垠의 딸로, 가정 경술년(1550, 명종 5)에 제천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청수하고 명민하며 남달리 빼어났다. 이윽고 자신을 반성하기에 이르 러서는 아버지와 형의 훈계하는 말을 들으면 그때마다 마음속에 받아들여 잊는 법이 없었 다. 친척의 집이 옛 주천현酒泉縣(평창)에 있는데, 공이 8살 때 집을 지었다. 공이 ‘주천에 술이 없어 보고 듣는 이 이상히 여기네/酒泉無酒見聞異’라고 한 구절을 짓자, 식자들이 그 재치를 기이하게 여겼다. 아버지 이경윤은 활쏘기와 말 타기에 전념하고 있었으므로 훈계하고 가르치는 데 올바른 방도가 아닐까 걱정하여 청주淸州의 종숙부 이징사李徵士에게 가서 가만히 세 아들을 부 탁했다. 그 두번째가 공으로, 공은 당시 15살이었다. 이징사는 공의 기운이 호탕하면서도 뜻은 순수한 것을 보고 기꺼이 데려다 교육을 시켰다. 염계서당剡溪書堂에 거처를 마련하고 멋대로 놀게 하며 별로 학업을 시키지 않았는데도 날이 가고 달이 가니 몇 년 만에 문장과 행하는 것 모두 진전이 있었다. 당시 염계서당에는 항상 수십명의 배우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누구도 앞서지 못했다. 무진년(1568, 선조 1)에 증광시 향시에서 생원·진사 양쪽에 모 두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이듬해 목사 유중영柳仲郢이 고을의 선비들을 불러 재주를 겨루게 했는데, 공이 수석을 차지했다. 재상 서애西厓(유성룡)가 수찬이 되어 부모님을 뵈러 가던 중에 공의 글을 보고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나라의 뛰어난 선비가 될 것 이라고 기대했다. 이로 인해 온 도에 명성이 자자하게 되었다. 경오년(1570, 선조 3)에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가 청연오촌淸淵烏村에 살았으므로 공은 가서 <논어>에 대해 질문했다. 잘 의심하고 잘 질문하여 모르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으니 박지화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수재가 나중에 얼마만큼 진보할지는 헤아릴 수 없겠소.” 공은 독서를 시작한 이후로 이미 옛 사람이 말한 ‘자기를 위한 학문’에 뜻이 있다는 것을 스 스로 알았다. <논어>를 읽게 되자 극도로 마음을 기울여 깊은 뜻을 찾고 생각했는데, 마음 을 함양하고 밖으로는 부드럽게 하여 스스로 깨닫고 날마다 새로워졌으며, 다시는 이 책 을 놓지 않았다. 거의 손이 춤추고 발이 움직이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 뒤 부모의 명으 로 과거 공부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뜻은 빼앗을 수 없었다. 임신년(1572, 선조 5) 선 비들을 모아놓고 여름에 글을 지었는데, 공이 매번 뛰어난 글을 짓자 동료들이 시기하니 공이 다투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먼저 가버렸다. 그러나 공이 끝내 수석을 차지했다. 또 계유년(1573, 선조 6)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되자 사방의 선비들이 벗으로 지내려고 하며 혹 뒤로 밀려날까 걱정했다. 염모할 뿐만 아니라 도의를 앞세웠기 때문에 믿고 따른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조정의 명망 있는 사대부들도 점점 예우하기 시작했다. 일찍이 교외에 나가 얼음을 밟으 면서 쓴 절구 시는 공의 학문이 이미 경敬을 위주로 하고 있음을 충분히 증명해 준다. 어느 날 과시課試(정기시험)에서 ‘재외양중잠制外養中箴(밖을 통제하고 안을 기르는 잠언)’을 지어 2등을 차지하였는데, 제주祭酒허초당許草堂(허엽)은 그의 논리가 특별히 깊이 있음을 사랑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주 이야기하며 특히 더 예우하고 소중히 대했다. 갑술년(1574, 선 조 7) 1월 청주로 돌아가 계당溪堂에서 병이 들었는데, 병중에 친한 친구의 부음을 듣고 직접 제문을 지어 보냈다. 이윽고 병이 위독해져 3월 20일에 일어나지 못했다. 나이 25세였다. 공의 형제들은 마치 부모를 잃은 것 같았다. 고을 북쪽의 목령鶩嶺아래 안치했다가 다음 달에 이 산에 장사지냈다. 뜻을 보고 행하는 것을 보면 공의 일생은 열사람 중 두세 사람도 잘할 수 없으므로 사람 들의 귀와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고 들렸다. 본가가 매우 가난한데 자기가 멀리 떨어져 있 으면 항상 사람 하나를 시켜 자기 대신 쌀을 짊어지고 가게 하였고, 맛있는 음식이 생기거나 옷 한 벌이라도 부모의 몸을 거치지 않으면 차마 자기가 먼저 먹거나 걸치지 못했다. 형님인 군수 이대수李大遂보다 세 살 아래인데, 마치 엄한 아버지를 모시듯 하였고, 동생 이대적李大迪이 공부가 늦은 것을 걱정하여 마음을 다해 우애하고 가르쳐 함께 생원이 되었다. 일찍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었으나 추후에 상복을 입는 정성을 행하지 못해 기일이 올 때마다 재계하고 지나친 예를 행했다. 이징사에게는 부모와 스승과 임금에 대한 의리를 다 해 모셨다. 부부 사이에는 부부유별의 도리를 정중하게 지켜 병이 장차 심해졌을 때 20리 가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 서로 찾아보지 않고 올곧게 끝마쳤다.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에게 다급한 일이 있으면 꼭 주선하여, 전염병에 걸렸더라도 기어이 돕고 살펴보고, 서로 평소 익힌 것은 꼭 실행으로 옮겼다. 이 모든 것은 공의 평소 생활이었으나 다른 사람은 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를 치르는 데 필요한 도구를 모두 서울 과 지방의 벗과 친지들이 맡아 처리하였고, 닭고기나 기장과 같은 물품과, 만사輓詞, 제문의 대부분은 먼 지방에서 온 것들이었다. 공의 배필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상락공上洛公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고, 부사직 김직수金直燾의 딸이다. 2남을 낳았다. 장남 시발時發은 기축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평안도관찰사 이고, 차남 시득時得은 유복자로 태어나 병오년 무과에 합격하여 현감이 되었다. 시발은 진사 여흥驪興민경남閔敬男의 딸을 배필로 맞아 1남 3녀를 두었는데, 큰딸은 이창운李昌運에게 출가하고 나머지 딸과 아들은 어리다. 측실 소생 세 아들은 모두 어리다. 시득은 사과 문화文化 유희연柳希淵의 딸을 배필로 맞아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신축년에 공은 전례에 의해 호조참판으로 증직되었고, 을사년에는 이조판서로 증직이 더해졌다. 표암에 상서한 기운 내려와 신라가 시작되고 / 익재공은 고려에서 쇠한 문화 일으켰으니 / 1천 5백 년을 누가 이씨처럼 이어 갔는가 / 이조에서 높이 솟아 재사당이 이름 을 얻었는데 / 사화로 원수 되어 하늘 뜻이 아득했다 / 실마리 돈독히 하여 진사공에 게 중망이 이르러 / 염계에서 학문을 발하여 공자에서 근원 찾으니 / 논어 한 권으로 성스런 스승 여기 있고 / 옛 사람을 벗 삼으니 어느 곳에 종사하겠는가 / 세상에서는 다만 기이한 재주라 하였네 / 바탕이 훌륭하니 어찌 과정을 거쳐 이르겠는가 / 부모의 명에 복종했으나 어찌 뜻을 빼앗겠는가 / 30살을 바랐으나 24살로 마쳤으니 / 꽃은 피되 열매 맺지 못했으니 슬프지 않는가 / 이치가 꼭 있어서 두 아들을 남겼으니 / 문은 본디 집안의 내력 무 역시 수준급이네 / 자질 겸비하여 크게 일어나 관찰사 되어 / 큰 지역 다스리고 온갖 직임 잘 해내어 / 돌아가신 분 받들어 영화와 효도 다하니 / 정경 을 하사 받고도 또 더함이 있었다 / 예로부터 산소에는 증직을 표시하는 법 / 효도 끝에 말마다 선조의 훌륭함이지만 / 내 명문 틀림없으니 와서 보는 대로라네 / 무엇을 권 하겠는가? 인자한 사람과 효자라네 공을 처음에는 목령 아래 장사지냈다가 나중에 다시 옮겼다. 천계 정묘년(1627, 인조 5) 에 진천鎭川의 동쪽 초평草坪서향 언덕에 영구히 장사 지냈다. 숭정 무진년(1628, 인조 6) 에 부인 김씨가 사망하여 같은 언덕에 장사 지냈다. 천계 갑자년(1624)에 좌찬성으로 증직이 더해졌는데, 진무공신으로 추은推恩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문은 만력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지어졌고,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 무술년(1658, 효종 9)에야 비로소 비석에 새겼다. 숭정 무술년 7월 일 세움.
비문은 첫머리에 비문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그리고 전액을 쓴 서자의 순으로 기록하였다. 비문의 본문은 아들인 이시발의 비문 구조와 비슷하게 이루어졌다. 첫째는 경주 이씨 의 역사와 가계와 내력에 대한 기록이다. 둘째는 공의 행장에 대한 기록이다. 출생으로부터 돌아가시기까지의 행적을 기록하였는데, 공의 글이 남달리 뛰어났음을 서술하였다. 셋째는 공의 성품을 기록하였다. 부모와 스승과 임금에 대한 의리와 부부유별夫婦有別의 도리 그리고 붕유유신朋友有信의 도리를 다했던 인물로 기록하였다. 넷째는 공의 가족 관계에 대 한 기록이다. 공의 부인인 안동 김씨와 함께 슬하에 두었던 2남과 그 후손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다. 마지막에는 비명碑銘을 기록하였고, 비문이 지어지고 50여 년이 지난 이후에 비석에 새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시발 비문과 함께 당대의 역사적 사실 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시발의 신도비. 이시발[1569~1626]은 인조 대의 문신으로, 1596년(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북변(北邊)을 방비하기 위해 함경감사로서 포대와 성곽을 보수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체찰부사(體察副使)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남한산성의 축성을 감독하다가 순직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익이다.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에서 국도 34호선을 따라 증평 방향으로 달리다 초평면소재지 삼거리에서 지전마을로 들어가기 전 좌측 양촌마을로 가는 지전교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진천 이시발 신도비는 방형 대좌 위에 높이 175㎝, 너비 100㎝, 두께 29㎝의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었다. 이수는 앞면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잡고 다투는 형상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여의주를 잡고 있는 한 마리 용이 새겨져 있으며, 이수 옆면과 주위는 운문(雲文)으로 처리하였다. 대좌의 규모는 높이 57㎝, 너비 172㎝, 두께 121㎝로 앞면은 삼단으로 구분하여 밑으로부터 인동문, 당초문, 연화문의 순서로 새겼다. 전액은 ‘증 의정부 좌찬성 행형조판서 이공 신도비명(贈議政府左贊誠行刑曹判書李公神道碑銘)’으로 새겨져 있으며, 이정영이 썼다.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宋浚吉)이 썼다. 진천 이시발 신도비는 보호각인 쌍오비각(雙梧碑閣) 내에 부친인 이대건(李大建)의 신도비와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비석의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이시발 신도비 전면은 주차장 및 편의시설[파고라]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초평천이 흐르며 그 위에 양촌마을로 통하는 지전교가 자리하고 있고 동남쪽으로 지전마을, 동쪽으로는 이시발·이대건 묘, 이시발 부인인 고령신씨 묘소 등 관련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1984년 12월 31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번역문> 유명조선국 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판의금부사 세자이사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대 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행정헌대부 형조판서 겸지의금부춘추관사 이공의 신도비명 가선대부 예조참판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가선대부 호조참판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썼다.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지제교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이정영李正英이 전액篆額 을 썼다. 이씨李氏는 경주 이씨慶州李氏가 가장 오래되었고 귀貴하다. 신라新羅때 알평謁平공이 있어 서 태조太祖를 도왔으니, 성씨姓氏가 나라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 후손 가운데 금서金書가 있 어서 신라新羅의 왕王으로서 고려高麗태조太祖의 사위가 된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벼 슬이 삼한 공신三韓功臣에 올랐다. 그 뒤 임해군臨海君진瑱과 익재益齋문충공文忠公제현齊賢에 이르러 부자父子가 서로 잇따라 크게 현달顯達하였는데, 익재는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실로 중국에서 저명著名하였다.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는 윤인尹仁이 있어서 실로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냈는데, 이 분이 창평현령昌平縣令공 인麟을 낳았다. 인麟은 취금醉琴박팽년朴彭年의 따님을 아내로 맞 았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음공陰功이 있었다고 하며, 아들 여덟을 낳았다. 그 중 셋째가 원黿인데, 곧은 품행으로 연산군燕山君때 죽었으니 세상에서 일컫는 바 재사당再思堂이다.
이 때부터 2대代는 가세를 떨치지 못했다. 그러다가 부친父親인 진사進士공에 이르렀는데, 진사 공은 학문이 순수하고 행실이 크게 닦여진 분이었으므로 태학太學의 제생諸生들이 감 히 함께 어깨를 나란히 견주지 못했으며,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공을 낳 았다. 공은 휘諱가 시발時發이요, 자字가 양구養久이다. 공은 태어나서 6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 다. 조금 자라나자 스스로 분발하여 뜻을 가다듬을 줄 알았는데, 서계西溪이덕윤李德胤에게 나아가 배웠다. 문장을 짓게 되자 그 짜임새가 천연天然스럽게 이루어졌으며, 과장科場에서 재주를 겨룸에는 여러 번 시관試官을 탄복하게 하였다. 나이 21세 때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갔다. 그러나 스스로 아직 학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여 동료들과 작 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다시 서계西溪공을 섬기며 경적經籍을 연구하였다.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아니 되어 왜적倭賊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갑자기 이르 렀으므로 어두운 새벽에 남쪽으로 내달아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산골짜기로 피난避難하였다. 그 때 선조宣祖께서는 이미 평양平壤으로 몽진蒙塵하였기에 마침내 의병장義兵將박춘무朴 春茂를 따랐는데, 격문檄文과 계책計策이 공의 손에서 많이 나왔으며, 병사 1천여 인人을 모 집하여 인근에서 둔屯치고 있는 왜적을 물리쳤다. 얼마 뒤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갔는데, 소疏를 올려 환도還都하여 민심을 수습할 것을 청하 였다. 이에 일송一松심희수沈喜壽가 탄복하여 이르기를 ‘왜란이 발생한 후 이러한 논의나 글 이 없었다’ 하였다. 조정에서도 잇따라 다시 힘껏 환도하기를 청했으므로 임금께서 비로소 환도할 계책을 결단하였다. 오성鰲城이항복李恒福이 공이 재주 있고 지혜롭다 하여 천거하 니, 임금께서 명明 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로부터 병법兵法을 전수傳受받으라고 명하였다. 공 이 낙駱공을 뵈니, 낙 공이 놀라며 탄복하여 이르기를, ‘이런 인물은 중국에서 구해도 역 시 그 유類가 드물다’ 하였고, 마침내 대부인에게 인사를 드렸으며, 또 임금에게 말하기를 ‘이시발은 기재奇才이니, 왕王께서는 그를 크게 쓰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 때부터 명나라 장수가 우리 나라에 이르면 반드시 공이 그 업무에 참여하게 되었다. 규례대로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제수除授받았다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으며,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옮겨 지제교知製敎, 훈련도청訓練都廳, 한학교수漢學敎授, 승문원검교承文院檢校등을 겸대兼帶하였다. 얼마 뒤 또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대하였 고, 또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송강松江정철鄭澈을 추론追論하자는 의론 議論이 심히 급박하였는데, 공은 그 논의에 대해 의리 상 회피하며 참여하지 않았다. 체개 遞改하여 사서司書가 되자, 오성鰲城이李공이 임금께 아뢰어 병조로 옮기게 하고 그 자신은 기밀機密을 도우면서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모두 공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유격游擊진운홍陳雲鴻을 파견하여 조칙詔勅으로 왜적을 효유曉諭하게 하였 는데, 임금께서는 공으로 하여금 함께 가게 하였다. 이에 공이 적정賊情을 정찰偵察하여 복 명復命하니 특별히 정랑正郞을 제수하였다. 그 뒤 어사御史로서 호서湖西·호남湖南의 군사軍事 를 순검巡檢하였다. 그러나 제사制使이종성李宗誠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이르자 마침내 공이 소환되어 어전통사御前通事가 되었는데, 공의 주선周旋이 익숙한데다가 박학博學하고 민첩敏 捷하였으므로 임금께서 기뻐하며 포장襃獎하고 채단綵緞을 하사하였다. 다시 호남에 파견되어 병영을 순검하고 성균사예成均司藝에 임명되었다. 홍산鴻山의 역적 逆賊 이몽학李夢鶴의 난亂이 평정되자, 임금께서 공이 정예병을 뽑아 선봉에서 진격한 일을 가상히 여겨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승진 임명하였다. 그러나 공을 꺼리는 자들은 ‘군대가 소 요騷擾하고 백성들이 도적질하는 것은 실로 이 모李某로부터 말미암았다’고 상언上言하여 헐 뜯었으므로, 공은 마침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당시에 왜놈들이 다시 쳐들어오려 하였으므로, 체찰사體察使이원익李元翼이 공을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얼마 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승진하고 찬획사贊畫使가 되었는데, 공은 충주忠州를 진수鎭守하면서 조령鳥嶺에 목책木柵을 설치하고 덕주산德周山에 성城을 쌓아 요해처要害處를 둘 러쌈으로써 그 지역을 고수固守할 계책을 삼았다. 이에 왜적이 빙 돌아서 공의 뒤쪽으로 치고 나왔으므로 공은 청주淸州로 되돌아와서 싸웠는데, 군사의 수효가 크게 차이나서 마침 내 패배하였다. 얼마 후 명 나라 장수를 따라 도망하는 왜적을 의성義城까지 추격하였고, 또 군량軍糧의 운반을 관장하여 명군明軍의 양식을 대어주었으며, 또 대신大臣의 직임을 섭 행攝行하여 경리經理양호楊鎬를 접대하였다. 임금께서 공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경주慶州에 축성築城하게 하니, 공은 중의衆議를 수렴하 여 축성함이 이롭지 않다는 점을 상언上言한 결과 마침내 그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사이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임명된 것이 두 번이었으나 그 때마다 비판하는 말로 인해 체직遞職 되었으며, 성주목사星州牧使로 나갔다가 20일 만에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옮겨서 성심껏 백 성들을 위무慰撫한 결과 남쪽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다시 경상감사에 임명된 다음, 왜적에 대해 복수하고 우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계책을 상소로 진술하였다. 정인홍鄭仁弘이 전후前後로 자신을 붙잡지 않은 공에 대해 유감遺憾을 품은 나머지 여러 사람들을 사주使嗾하여 공을 탄핵彈劾하였는데, 임금께서는 공의 소장疏狀을 살펴보고 극력 사직辭職함에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임기가 두 번이나 찼지만 그 때마다 그대로 잉임仍任하게 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가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임명되었으 며, 비국당상備局堂上, 실록당상實錄堂上,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춘추관사春秋館事등을 겸대兼帶하였다. 이 때 마침 여진족女眞族홀추忽酋가 북관北關지방을 소요騷擾하였는데 관군이 싸 움에서 밀리므로 공을 함경감사咸鏡監司로 삼았다. 이에 임금께서 공을 인견하여 선온宣醞하 고, 궁시弓矢·표피豹皮·마장馬裝등의 물품을 하사하였다. 그런데 공이 임지에 이르자 홀추가 사죄謝罪하며 귀순歸順하기를 요청하였으므로, 역마驛馬를 달려 조정에 보고하니 그 요청을 허락하였다. 공이 대부인을 임소任所에 오시게 하여 봉양하려고 함에 대부인께서 길을 나 섰다가 길에서 병환에 걸렸다. 그러자 임금께서 약물藥物을 지급하도록 명하고 또 소재지 에서 호송護送하도록 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예롭게 여겼다. 노奴·홀忽 이추二酋가 종성鍾城에서 싸우게 되어 변경의 경보警報가 극심하였으므로, 공이 체직되어 교대하려 하자 마침내 그 직임을 잉임仍任하게 하였다. 공이 북관에 있은 지 여러 해 되었는데 경계警戒의 설비를 잘 갖추어 빠뜨린 점이 없었으며 저들에게 은혜와 위엄을 동시에 보여주었으므로, 이추二酋가 약조約條를 지켜 그 곳 백성들을 약탈掠奪하지 않았다. 체직되어 돌아와서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가 예조참판禮曹參判및 병조참 판兵曹參判으로 전직轉職되어 다시 예전처럼 기밀機密을 겸대兼帶하였으며, 혹 부체찰사副體察 2 부 문 화 396 使나 경총서북군經摠西北軍이 되기도 하였다. 선조宣祖께서 붕어崩御하시자 감빈전사監殯殿事가 되었고,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를 역임한 다 음 외직으로 나가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었다. 그 때 행인行人웅화熊化와 태감太監유용劉用이 잇따라 나왔으나 공이 적절히 주선周旋한 덕분에 별다른 소요騷擾없이 일이 처리되었으며, 두 사신使臣도 또한 공을 대우함에 매우 공경恭敬스러웠다. 휴가를 청하여 전부인前夫人을 귀 장歸葬하였으며 이어서 부친의 묘를 개장改葬하고 나서 소疏를 올려 3개월의 복제服制를 마 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조사詔使염등冉登이 이르자 광해군光海君이 공을 소환하여 어전통사御前通事로 삼았고 마침 내 공은 군국軍國의 여러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한성부부윤漢城府副尹을 거쳐 다시 병조兵 曹로 옮겼으며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였다. 공은 우복愚 伏 정경세鄭經世와 친하게 지냈는데 일찍이 정 공에게 서신을 보내어 시사時事를 대략 말한 적이 있었다. 정 공이 어떤 사건으로 체포되니 광해군이 정 공의 집안 문서를 수색하여 공 의 서신을 보고 난 다음 공을 미워하여 정 공과 함께 법을 맡은 관리에게 회부하였으며, 마 침내 공의 관직을 삭출削黜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자 다시 공을 서용敍用하여 안변부사 安邊府使를 제수하였다. 그 뒤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옮겼으나 미처 부임하지도 못하고 체직되어 돌아왔다. 당시에 흉악한 무리들이 모후母后를 폐위廢位할 것을 획책하였으므로, 공은 정홍익鄭弘翼공과 함께 상언上言하기를 ‘모후는 절도絶道함이 없었다’ 하고 마침내 바깥 출입을 끊고 스스로 벼슬길 에 나아가지 않았다. 양사兩司에서는 의론議論을 달리하는 자를 조사하여 법으로 다스리기를 더욱 급박하게 하였으므로 공은 당시 파주목사坡州牧使로 있었으나 마침내 벼슬을 버리 고 고향에 돌아와서 처벌을 기다렸다. 그 때 마침 명나라는 우리나라의 군대에게 노추奴酋 를 협공挾攻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원수元帥강홍립姜弘立은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그 러자 서쪽 변경이 크게 동요하였는데, 체찰사 장만張晩이 진수鎭守하는 중에 신병身病이 있 다고 보고하였으므로 특별히 공을 기용起用하여 오도찬획사五道贊畫使로 삼고 그 직임을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공은 관서關西에 이르자 공물貢物과 부세賦稅의 부담을 감경減輕하여 백성 들의 힘을 여유餘裕롭게 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연강沿江의 형세를 시찰視察하여 방략方 略을 그림으로 그려 올렸으며, 또 양서兩西의 10영營을 설치하였으니 이 때부터 병정兵政에 계통이 서게 되었다. 광해군은 공이 오래도록 수고한 점을 생각하고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 夫의 품계로 승진시키고 글을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노추奴酋가 요동遼東을 함락하였는데, 공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안주安州 에 진주進駐한 다음 엄중히 신칙申飭하여 진수鎭戍하였다. 그리고 차자箚子를 올려 아뢰기를 ‘이 도적盜賊은 반드시 전진하여 중국의 관내關內를 침범하면서 우리가 그 후미後尾를 노리는 점을 염려할 터이니, 그렇다면 우리가 틀림없이 중국보다 먼저 그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 다.’ 하였다. 또 요청하기를 ‘기강을 떨쳐 일으키고 상벌을 분명히 할 것이며, 현명하고 유 능한 인재를 임용하고 부세賦稅를 경감할 것이며, 잃어버린 인심을 수습하고 무궁한 국운 을 기원하소서’ 하였으며, 동시에 변방의 일에 관하여 자세하게 조목별로 진술하였다. 광 해군은 이에 상방검尙方劍한 자루를 하사하며 이르기를 ‘대장大將이하를 이 상방검으로 처 치하라’ 하였다. 만호萬戶변일邊溢이 오랑캐의 기병騎兵백여 명을 보고 곧바로 성城을 버리 고 도망하였기에 공이 그를 붙잡아다 참斬하였다. 그런데 변일은 바로 왕실의 인척姻戚이었 으므로 광해군이 크게 노한 나머지 글을 내려 공을 절박하게 책망하면서 변명하는 것도 허 용하지 않았다. 인조대왕仁祖大王이 반정反正한 이후 즉시 공을 인견하여 서쪽 변경의 일을 골고루 물어보 았으므로 마침내 ‘장수를 뽑고 병사를 조련하는 방책方策’을 올리니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비 국備局에서 청하여 공을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삼았고 또 의금부사義禁府事와 춘추관사春秋館事 를 겸대하였는데, 얼마 뒤 한성대윤漢城大尹에서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옮겼다. 이괄李适이 모반 謀叛하자 공이 명을 받고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는데, 단기單騎로 임지로 가면서 병사들을 모은 다음 평산성平山城에 나아가 지키면서 적도賊徒들을 기다렸다. 적도들은 사잇길로 곧 장 저탄猪灘으로 달려 갔으므로, 공은 편장偏將이중로李重老를 별도로 보내어 방어하게 하였 는데, 이중로는 공의 지시를 어기고 드디어 패배하여 죽었다. 그 때 임금께서는 남쪽으로 몽진하였고 적도들은 경성京城에 들어갔다. 공이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을 만나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안산鞍山마루에서 싸우도록 지시한 결과 적 도들이 패주敗走하였다. 공이 경성에 들어가서 궁전과 종묘를 깨끗이 청소한 다음 적도들 에게 붙었던 자들에 대해 그 명단을 가져다가 죄다 불에 태워버리니 민심이 크게 안정되었 다. 임금께서 환도還都하시자 공이 원수元帥와 함께 한강에서 영접하니 임금께서 어가御駕를 멈추고 노고를 위로하였다. 얼마 있다가 전공戰功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의 품계로 승진하고 백금白金을 하사받았으며, 체부體府의 일을 계속 겸대하고 사역원司譯院·전생서典牲暑·주병감 鑄兵監의 제조提調등을 겸임하여 강도江都의 보장保障을 관할하였고, 삼남도검찰사三南都檢察使 가 되어 남한산南漢山에 축성築城하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 때 돌아가신 부父휘諱대건大建에게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추증하고, 조부 휘 경윤 憬胤에게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추증하고, 증조 휘 발渤에게 좌승지左承旨를 추증하였으며, 돌아 가신 모·조모·증조모에게도 이에 상응하여 품계를 추증하였다. 얼마 뒤에 재판을 심리한 내용이 임금의 뜻을 거슬러 정위廷尉의 심문을 당했으나 하룻밤을 지나서 풀려났으며, 단지 형조판서의 직임만 체면遞免되고 겸직은 모두 체개遞改되지 않았다. 공은 대부인이 막내 아들 시득時得의 임소任所에 계실 때 휴가를 얻어 찾아뵈었다. 되돌아와서 지중추부사知中樞 府事에 임명되었는데 병환으로 군기軍機의 제반 직무를 해면解免하였다. 대부인께서 병환이 드셨다는 소식을 듣고 공은 병든 몸을 가마에 의지하여 급히 달려갔는데, 임금께서는 사람을 보내어 뒤미쳐 약물을 내려 주셨다. 명나라 장종황제章宗皇帝가 태감太監왕민정王敏政을 보내어 우리 임금을 책봉冊封하게 하였 다. 이에 공은 ‘국가에 큰 경사가 있는데도 물러나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하고 아주 무더운 날씨에 억지로 병든 몸을 일으켜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병이 마침내 위중해 져서 천계天啓병인년(1626, 인조 4) 1월 1일에 58세로 졸卒하였다. 처음에는 청주淸州땅에 무덤을 모셨으나 나중에 진천현鎭川縣동쪽 초평리草坪里의 진좌震坐의 언덕에 무덤을 고쳐 모셨다. 공이 처음 질병에 걸렸을 때부터 임금께서 사람을 시켜 물어보는 일이 매우 잦았는데, 병이 위독해지자 내의內醫를 유숙留宿하게 하며 병세의 차도 내지 위독을 보고하게 하였고, 장 례를 치를 적에 미쳐서는 연도沿道의 고을에 명하여 호상護喪하게 하였으며, 장구葬具를 지 급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진무振武의 공功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영의정좌찬 성領議政左贊成을 추증하였고 별직別職은 규식에 따랐다. 공은 풍채風彩가 준결峻潔하고 성품이 조용하여 비록 창졸 간의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규모規模가 원래 정해져 있어서 실수를 범 한 적이 없었다. 매양 일찍 부친을 여읜 일을 한恨스럽게 생각하여 그 효행을 백숙부伯叔父에게 옮겨 실천 하였으되 애경愛敬함에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선행善行을 보게 되면 부러워하 면서 칭송하였으나 과오過誤를 보게 되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 들은 공을 좋아하였고 못난 사람들은 공을 원망하는 일이 없었다. 공은 젊었을 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여 백가百家의 서적에 두루 관통貫通하였는데, 더욱 선유先儒의 학설에 힘을 쏟았다. 부녀들의 일과 생계를 꾸리는 일 따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유 의하지 않았으나, 관직이나 사무를 맡게 되어서는 진심진력盡心盡力하면서 쉬운 일과 궂은 일을 가리지 않았다. 성품 또한 영민英敏하고 과단果斷하여 비록 기무機務가 한꺼번에 밀려 닥친다 하더라도 귀로는 듣고 눈으로는 읽으며 입으로는 대답하고 손으로는 결재하는 식 으로 일을 처결하였으되 자세하고 적절하게 처리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눈앞의 계책을 세우지 않았으니, 영남嶺南에 있을 때 『주변록籌邊錄』 한 편을 저술하였는데 모두 장구한 계 책으로 쓰일 만하며, 진주晉州와 고성固城의 두 병영兵營은 모두 공이 이설移設한 것이다. 또 식견識見과 사려思慮가 깊고 멀었으니 성패成敗를 결정하거나 계산함에는 손가락을 헤아려 드러내었다. 노추奴酋가 처음에는 세력이 심히 미약하였는데, 공은 그의 용병用兵하는 모양 을 탐지해보고 마음 속으로 홀로 염려하면서 이 뒤에 후환거리가 되리라고 여겼다. 그러 므로 공이 서관西關에 있을 때 병사들을 조련調練하고 둔전屯田을 경영하는 등 장래의 화란禍 亂에 대한 대비를 극력 강구하였던 결과 변방邊方의 기무機務가 잘 정비되어 서쪽 지역에 근심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 상하의 관료들이 안일安逸에 젖어 있었으므로 무릇 진정陳情하 거나 청원請願하는 일이 저지되고 거부당하여 계획대로 다 시행되지 못한 결과 정묘년丁卯 年과 병자년丙子年에는 곳곳에서 와해瓦解되기에 이르렀으니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모후母后께서 유폐幽廢된 때를 당하여 조금만 저들의 비위에 어긋나면 주벌誅罰이 곧바로 닥쳐왔는데 공은 스스로 지조를 지킴이 더욱 독실하여 조금도 흠 잡힐 점이 없었다. 일찍이 청주淸州의 후영리後穎里에 집을 짓고 살면서 그 곳의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후영어은後穎漁隱이라고 자호自號하였다. 또 벽오碧梧라는 호도 사용하였는데 상촌象村신흠申欽, 추탄楸灘오윤겸 吳允謙, 수몽睡夢 정엽鄭曄같은 한 시대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공을 마음으로 흠모하여 사귀었 다. 정우복鄭愚伏은 늘 말하기를 ‘이시발의 학술에 대해서는 사람들 중에 아는 자가 드물다’ 하였다. 공은 문사文詞가 풍부하고 아름다워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므로 사단詞壇의 맹 주盟主라 하는 자들도 공의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그러나 공은 학문學問에 진력盡力 할 수 없다는 점을 한恨으로 여겼다. 저작著作한 문고文稿약간 권卷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의 초취初娶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진사 민경남閔敬男의 따님이다. 슬하에 1남을 두었으 니 경연慶衍이요, 3녀를 두었으니 각각 충의위忠義衛이창운李昌運, 장령掌令정백정鄭百亭, 유 3 장 유 적 과 유 물 399 학幼學조중소趙重素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후부인後夫人은 고령 신씨高靈申氏로 승지 신응구申 應榘의 따님이다. 슬하에 2남을 두었으니 정랑 경휘慶徽와 관찰사 경억慶億인데, 문과의 급 제가 연이어져 한 세상의 명인名人이 되었다. 1녀를 두었으니 부사 서정리徐貞履에게 출가하 였다. 측실側室에서 난 아들로, 경충慶忠은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로 있고, 경선慶善은 문 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내고 병자년丙子年에 전사戰死하였으며, 경종慶從은 업무業武이다. 측실의 딸은 참판參判박정朴炡의 첩妾이다. 이창운의 아들은 참봉 중신重藎과 그 아래로 중 재重材·중희重熙·중빈重彬·중미重美가 있고, 두 딸은 판관 조곤趙稇과 조세현趙世顯에게 출가하 였다. 정백정의 1녀는 봉사 권단權偳에게 출가하였다. 조중소의 아들은 시정始鼎과 시승始升 이고, 딸은 유신일兪信一에게 출가한 장녀와 아직 어린 차녀가 있다. 서정리의 아들은 진사 문상文尙과 생원 문중文重이고, 세 딸은 김영석金英錫·홍선경洪善慶·한주상韓柱相에게 출가하였 다. 4남 4녀는 모두 어리다. 경휘는 6남을 두었으니, 인환寅煥은 경연의 후사가 되었고, 인 혁寅爀은 진사이며, 그 아래로 인욱寅煜·인찬寅燦이 있고 나머지는 어리다. 경억의 아들은 인 소寅熽이다. 2남 2녀는 모두 어리다. 경충은 2남 1녀를 두었다. 경선은 2남 3녀를 두었다. 경종은 1남 2녀를 두었다. 이리하여 내외의 손자와 증손자들이 모두 50여 인이다. 공은 조 정에 나선 지 40년 동안 한결같이 청신淸愼한 마음을 지녀서 마침내 자신을 돌보고 후손을 돌보아 복록을 무궁토록 남겼으니。가히 소대昭代의 명신名臣이라 이를 만하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이씨의 집안은 신라 초기부터 대대로 이름을 드러내었는데 / 고려高麗의 운수가 다하려 할 때엔 익재益齋가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다네 / 조선에 들어와서도 인물이 있어 서 경西京을 다스린 이 있었다네 / 취금醉琴박팽년朴彭年의 사위는 실로 창평현령昌平縣令을 지낸 이인李麟인데 / 이인의 여덟 아들들은 참으로 길조吉兆에 들어맞았네 / 4대를 지나 서 공이 태어났는데 홍곡鴻鵠이나 난鸞새처럼 자태가 우뚝하였네 / 환도還都하라는 소 疏를 공이 맨 먼저 올렸으니 여러 영재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도다 / 마침내 유학儒學 을 탐구하였으니 주자朱子에서 정자程子로 거슬러 올라갔었네 / 백가百家도 섭렵하여 병 법兵法까지 익혔으니 담소하는 도중에도 군사軍事를 얘기하네 / 마침내 떨쳐 일어나 공 업功業을 세웠으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였다네 / 어찌 우리 임금님께서만 공의 순 성純誠을 살폈으리오 명明나라에서 온 사신使臣도 경의敬意를 표하였고 형제처럼 다정히 지냈다네 / 공의 한 몸에 공명功名이 모이자 숱한 사람들이 공의 복록을 시기하였고 / 공께서 우뚝한 공훈을 세우니 그 공훈을 비평하여 손상損傷하였지만 / 임금께서 그 실질을 힘입어 넘어짐이 없이 갈 수 있었다네 / 결국 남방南方을 안정시켰으니 다친 사람을 위무慰撫하고 무지한 자를 깨우쳤네 /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선비들은 그 원칙을 칭송하였네 / 북쪽의 오랑캐가 갑자기 설쳐서 변방의 백성들 놀라게 했네 / 임 금께서 말하기를 그대가 가라 그대는 나라의 간성干城이다 하시고 궁시弓矢를 내려주 시고 표피豹皮와 마장馬裝등도 내려주셨네 / 공의 수레 빨리 달리자 변방의 오랑캐 깨 끗이 소탕되었네 / 진북루鎭北樓와 만갑정萬甲亭으로 우리의 방어防禦는 공고鞏固하고 성장城嶂은 높디높은데 / 혼암昏暗한 무리들이 모후母后를 원수로 여겨 흉측凶測한 의논을 울타리 안에서 하는도다 / 그러나 공께서는 곧은 지조를 지켜 저들의 위협에 겁내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았다네 / 외직으로 나가 오도찬획사五道贊畫使가 되자 서쪽 변방이 잠 잠해졌으며 / 사절使節을 휘날리자 남녀노소가 환영하였네. 어찌 감히 편안히 지내리오。 요동遼東과 관내關內가 전장戰場이지만 평안도가 평온하고 압록강이 청정淸淨하였네 / 변방邊防이 완전하다 하여도 본원本源이 깨끗하여야 하니 / 여러번 소를 올려 그 말을 하 였으나 어리석어서 아무도 공의 말 듣지 않았네 / 성聖스러운 임금이 보위에 올라 노성 老成한 신하를 애타게 찾았으니 / 그대가 조정에 나와서 형조판서가 되어달라 했네 / 이 괄李适이 모반하자 공은 다시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어 경성京城을 수복收復하니 불안했던 임금께서 안녕을 되찾았네 / 높은 공훈으로 크게 천거되니 아무도 공과 겨룰 수 없었는데 /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명성 잃지 않았다네 / 후손이 많고도 많은데 공의 본을 잘도 이어받았으니 / 어떤 이는 변방을 지키고 어떤 이는 전형銓衡을 돕는다네 / 어떤 이는 국 사國事에 목숨 바쳤으니 / 또한 곁의 사람이 영예를 차지하네 / 무릇 오늘날 보답을 받 음은 공이 아니고 누구이랴 / 내가 공의 사적事跡을 모아서 감히 이 명문銘文을 짓노라. 살피건대, 박팽년朴彭年 공의 별호別號는 여러 사람들의 비갈碑碣에서 모두 ‘취금醉琴’이라 하였지만, 그러나 내가 박 공의 사위인 종실宗室이천李瑔의 말을 들어보니, ‘취금醉琴’이라 고 자호自號하였다는 말은 박 공이 쓴 『천자문千字文』에 공의 인장印章을 찍어서 세상에 유 포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공의 호號라고 잘못 인식한 것이었다고 한다. 혹 이러한 이치도 있을 법하기에, 들은 바를 기록하여 후일의 참고에 대비하는 바이다. 숭정崇禎무술 년(1658, 효종 9) 7월 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가장 첫머리에 전액篆額을 두고 이어서 비문의 찬자撰者와 서자書者그리고 전액을 쓴 서자의 순으로 기록하였다. 비문의 본문은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경 주 이씨의 역사와 가계와 내력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고려에서는 익재益齋이제현李齊賢의 문장과 덕업이 뛰어났음을 밝히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공公의 7대조인 이윤인李尹仁으로부 터의 가계를 이어서 서술하였다. 둘째는 공의 행장에 대한 기록이다. 출생으로부터 관직 생활 그리고 돌아가시기까지의 행적과 관련된 크고 작은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서술하였다. 셋째는 공의 행적 가운데 성품을 평가할 수 있는 일들과 저술에 대한 기록이다. 넷째는 공 의 가족 관계에 대한 기록이다. 공의 두 부인과 함께 슬하에 두었던 3남 3녀에 대한 간략 한 행적을 서술하였다. 다섯째는 비명碑銘을 기록하였고, 마지막으로 6대조인 이인李麟의 장인이었던 취금醉琴박팽년朴彭年의 호에 대한 사실 관계를 기록하여 후일의 참고가 되게 한다는 추기追記를 기록하고 있다. 이시발과 관련된 행적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는 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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