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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 석화리 서계이선생유허비(北二面 石花里 西溪李先生遺墟碑)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북이면 석화리 서계이선생유허비(北二面 石花里 西溪李先生遺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3. 2. 1. 16:41

 

북이면 석화리는 경주이씨의 집성촌입니다.석화리(돌꼬지, 석화)는 본래 청주군 산외이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돌로 꽂이를 이루었으므로 돌꽂이 또는 석화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대리, 소롱리, 대길리의 각 일부와 산외삼면의 비 중리 일부 를 병합하여 석화리라 해서 북이면에 편입되었습니다.

 

이득윤은 조선 중기의 역학자(易學者), 악인(樂人)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이다.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1588년(선조 21)에 진사가 되고 1597년 학행으로 추천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념하다가 왕자(師父)가 되고 이어서 형조좌랑·의성현령을 지냈다. 광해군(光海君)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하여 고향 청주에 머무르면서 김장생(金長生)·정두원(鄭斗源) 등과 서한을 교환하며 역학과 음악을 토론하였다.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에 거문고에 관련된 명(銘)·부(賦)·시(詩)·서(書)·악보(樂譜)·고금금보(古今琴譜) 등을 집대성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라는 귀한 거문고악보를 후세에 남겼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선공감(繕工監)의 정(正)이 되고 이듬해 괴산군수가 되어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관기를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유학자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易學)을 배웠다.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서계집(西溪集)』·『서계가장결(西溪家藏訣)』이 있다.

특히 정두원과 나눈 서한의 내용을 담은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는 『안상금보(安常琴譜)』, 『조성금보(趙晟琴譜)』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전의 음악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米院面) 가양리(佳陽里) 인경산(引頸山) 아래에 있다.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안에서 청주시 분평동으로 이건한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이득윤 [李得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미원면 옥화리 옥화서원(米院面 玉花里 玉華書院) (tistory.com)

 

미원면 옥화리 옥화서원(米院面 玉花里 玉華書院)

1717년(숙종 42)에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을 주향으로 후에 주일재(主一齋) 윤승임(尹昇任, 1583∼1688), 옥계(玉溪) 박곤원(朴坤元, 1477∼1607), 돈암(遯菴) 윤사석(尹師晳)을 차례로 추배

king6113.tistory.com

 

이득윤(李得胤, 1553~1630)조선조 문신․학자. 본관 경주. 초명은 덕윤(德胤), 자 극흠(克欽), 호 서계(西溪).청원군 강내면 석화리 출신. 부친은 잠(潛)이다. 1572년(선조 5) 서기(徐起)로부터 높은 학문수준을 인정받았으며, 1573년(선조 6) 역학자 박지화(朴枝華)가 역학에 전심하는 인물 중에 출중한 인물임을 인정했다. 1592년(선조 25) 미원면(米院面) 가양리(佳陽里) 수락동(水樂洞) 시냇가에 작은 정사(精舍)를 짓고 완역재(玩易齋)라 했으며, 그 내를 불사천(不舍川)이라 했다.
1600년(선조 33) 왕자사부에 발탁되어 지성으로 가르쳤으며, 이해 수락동 선영 아래 추원당(追遠堂)을 건립했다. 1602년(선조 35) 주역(周易)에 오류가 많아 조정에서는 주역교정국을 설치했는데, 이득윤(李得胤)과 아우 이광윤(李光胤)이 교정국원으로 추천되었다. 1604년(선조 37) 의성현령에 제수되어 2년 후에 사직했는데 주민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이 때 왕은 위정(爲政)을 잘한 공으로 겉옷과 속옷 한 벌을 하사했다. 1609년(광해군 1)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미원면 옥화리(玉華里) 옥화대(玉華臺)에 춘풍당(春風堂)을 짓고 산장(山丈)에 추대되어 사림(士林)들을 훈도하였다. 광해군 2년(1610) 옥화리에 사창(社倉)을 설립하여 덕업을 권하고 환란을 구제하였다. 1622년(광해군 14) 유일(遺逸)로 공조정랑에 임명되어 본원지도(本源之道)를 함양해야 한다고 누차 계(啓)를 올려 왕이 쌀과 콩을 하사했다.
1624년(인조 2) 왕이 친히 도목(都目)하여 괴산군수에 제수하고, 선대조의 공로를 인정하여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1625년(인조 3) 괴산군수를 병으로 사임하고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에 은거하다 인조 8년(1630)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주역뿐 아니라 음악과 문학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으니,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서계가장결(西溪家藏訣)󰡕․󰡔서계집(西溪集)󰡕․󰡔상례(喪禮)󰡕 등 저술이 전한다. 특히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의 영향을 받아 창작한 <서계육가(西溪六歌)>, <옥화육가(玉華六歌)>는 국문학사상 중요한 가치를 가진 작품이다. 공덕을 기리기 위해 1986년 청원군 강내면 석화리에 유허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