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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청천면 화양동 신사언각자(靑川面 華陽洞 申思彦刻字) 본문
화양구곡의 제9곡인 파천가 암벽에 있는 신사언申思彦의 이름각자입니다.
승정원일기 1047책 (탈초본 57책) 영조 25년 8월 10일 병술 12/17 기사 1749년 乾隆(淸/高宗) 14년
...柳東國爲羅暖萬戶, 金義碩爲淸城僉使, 田光集爲訓鍊副正, 李景老爲都摠經歷, 金浣爲兼司僕將, 李潤成爲羽林衛將, 申思彦爲忠淸水使, 訓鍊參軍張世和本院去官, 李宜復爲慶州營將,...
신사언申思彦은 1691년(숙종 17)~미상.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사준(士俊)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거주지는 한양(漢陽: 현 서울)이다. 부친은 신수(申鏽)이다.
1725년(영조 1) 정시에 병과 126위로 무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통덕랑(通德郞)‧낭청(郎廳)‧벽동군수(碧潼郡守)‧길주목사(吉州牧使)‧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황해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영조 16) 벽동군수로 재임하면서 부정하게 뇌물을 받았던 사실이 암행어사의 논계(論啓)를 통해 알려져 투옥되었다. 1744년(영조 20) 일정 기간 동안 신역(身役)을 할 사람에게 신역 대신 포목(布木)을 거두어 들였다가 파직되었다. 1749년(영조 25) 8월 10일 임금이 관료들의 성적을 평가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1754년(영조 30) 황당선(荒唐船)을 탄 18명의 오랑캐가 백령진(白翎鎭)에 정박하자 그들을 육로로 청나라에 돌려보낼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오랑캐들은 10여 척의 당선(唐船)에 부하 수백을 이끌고 백령진을 포위하였고, 붙잡힌 18명을 풀어달라며 협박하였다. 그런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백령(李栢齡)에 의해 동료 18명 중 7명이 이미 황해도 장연현(長淵縣)으로 보내진 사실을 오랑캐들이 알게되었고, 나머지 동료 11명을 무력으로 석방시킨 뒤 장연현의 장교(將校) 한명을 포로로 잡아 자신들의 배에 가둬버렸다.
이때 신사언(申思彦)은 담당관으로서 병기(兵器)도 변변치 않은 당선의 위협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군의 위신을 떨어트렸다는 죄로 문책되었고, 끝내 양손이 묶인 체 얼굴에 회칠이 된 상태로 조정에 압송되어 장형 15대를 맞은 뒤 경상남도 남해현(南海縣)의 군졸(軍卒)로 충군(充軍)되었다
1725년(영조 1) 정시에 병과 126위로 무과 급제하였다. 관직은 통덕랑(通德郞)‧낭청(郎廳)‧벽동군수(碧潼郡守)‧길주목사(吉州牧使)‧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황해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영조 16) 벽동군수로 재임하면서 부정하게 뇌물을 받았던 사실이 암행어사의 논계(論啓)를 통해 알려져 투옥되었다. 1744년(영조 20) 일정 기간 동안 신역(身役)을 할 사람에게 신역 대신 포목(布木)을 거두어 들였다가 파직되었다. 1749년(영조 25) 8월 10일 임금이 관료들의 성적을 평가하는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1754년(영조 30) 황당선(荒唐船)을 탄 18명의 오랑캐가 백령진(白翎鎭)에 정박하자 그들을 육로로 청나라에 돌려보낼 것을 조정에 청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오랑캐들은 10여 척의 당선(唐船)에 부하 수백을 이끌고 백령진을 포위하였고, 붙잡힌 18명을 풀어달라며 협박하였다. 그런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백령(李栢齡)에 의해 동료 18명 중 7명이 이미 황해도 장연현(長淵縣)으로 보내진 사실을 오랑캐들이 알게되었고, 나머지 동료 11명을 무력으로 석방시킨 뒤 장연현의 장교(將校) 한명을 포로로 잡아 자신들의 배에 가둬버렸다.
이때 신사언(申思彦)은 담당관으로서 병기(兵器)도 변변치 않은 당선의 위협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여 군의 위신을 떨어트렸다는 죄로 문책되었고, 끝내 양손이 묶인 체 얼굴에 회칠이 된 상태로 조정에 압송되어 장형 15대를 맞은 뒤 경상남도 남해현(南海縣)의 군졸(軍卒)로 충군(充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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