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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성면 관정리 백석정(琅城面 官井里 白石亭)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낭성면 관정리 백석정(琅城面 官井里 白石亭)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4. 1. 30. 06:42

 

1677년(숙종 3)에 동부주부를 지낸 백석정 신교(白石亭 申灚)가 낭성면 관정리 지담가 바위 위에 세운 정자이다. 1927년 문중에서 중건하고 1987년 보수한 건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에 쪽마루를 깔고 통난간을 둘렀다. 현재 백석정에는 편액이 두 개만 걸려 있고, 많은 기문과 제영은 고령 신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白石亭記>
亭於白石 因以名亭 吾從叔所手刱 從叔少也 負奇氣 有萬里心 俄而倦於世 還四方 事如少游 盖嘗取叱咤者 而溺其竅爲嘯歌 回其駕長風破巨浪者 而理漁釣行募地 得墨之左白石 石臨溪陡 起四五丈 北去沙灘 三百武而近 南望石峰 二里而遙 雖谺側而騁眺遠 後有太古松 輕涼逼而淸陰森然 遂鑿山而通逕 就石上 架而爲亭以綰之 其左爲燠室二楹 不易月而翼然 龍頭簇椽 獅背負檻 丹雘耀日 宛若畵圖中 仰而屴岑崱峯 呑吐蔽虧於几席之間 俯而澄流激湍 縈紆綿複乎軒窓之下 極洒洒 令人悠然有若霅間想 君日携客登臨 風無返 雪無返 興不盡不返 每於落照時 倚朱欄待東鏡之吐 彩閣倒影 驚鱗躍波 輒呼酒掉船 

 

【번역문】
백석(白石)에 정자를 지으시고 그로써 이름하시니 나의 종숙(從叔)께서 손수 세우신 것이다. 종숙께서는 젊어서 뛰어난 기품을 지니셨고 만리심(萬里心)이 있으셨는데 갑자기 세상에 싫증을 내어 사방을 둘러보시니 마치 소유와 같은 곳이 있다, 대저 질타당할 것을 무릅쓰고 그 풍광에 빠지시어 휘파람불며 오히려 세찬 바람을 아랑곳 않고 큰 물결 헤쳐 낚시를 장만하고 찾은 곳에 나가셨으니 그 얻은 곳은 묵정(墨井) 왼편의 백석이었다. 그 바위는 계곡에 임하여 높이가 사오장이요 그곳에서 북으로 뻗친 모래 여울은 거의 삼백 무나 되었고 남으로 바라보이는 석봉(石峰)은 멀리 이 리나 되어 비록 휑한 골짜기 옆이지만 먼 곳까지 두루 볼 만하고 뒤에는 태고의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서늘하면서도 맑은 그늘이 가득하였다. 마침내 산을 뚫어 길을 내고 바위 위에 시렁을 걸어 정자를 지었는데 그 왼편을 얽어 더운 방 한 칸을 꾸며 놓으니 달이 바뀌기 전에 금방 날아갈 듯하고 용머리에 모인 서까래며 사자등에 엎인 난간 등의 단청 채색이 햇빛에 빛나니 완연히 한 폭 그림 속의 풍경 같았다. 우러러 보면 높이 솟은 봉우리에 이어진 봉우리 그림자가 책궤와 자리 사이에 숨었다 나타났다 가려졌다 이지러졌다 하고 굽어보면 맑게 흐르는 세찬 여울이 창문 아래 꾸불꾸불 얽히어 연달아 흐르는 지라 마치 물이라도 뿌리는 듯 지극히 시원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쏟아지는 비속에 유연히 우뚝 서있는 듯함을 생각게 한다. 공께서는 어느날 손님을 이끌고 이곳에 오르시면 바람이 불어도 돌아가시지 않고 눈이 내려도 돌아가시지 않으며 흥이 다 풀리지 않으면 돌아가시지 않으며 언제나 해가 질 무렵이면 붉은 난간에 기대앉아 동산에 거울 같은 달이 돋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달이 돋아 채각의 그림자가 물 위에 거꾸로 비치고 이에 놀란 물고기가 뛰어 물결을 일으키면 문득 술을 부르고 배를 저어서 하늘의 맑은 달을 좇아 달빛 흐르는 물결을 거슬러 오르며 흔연히 즐기느라 집에 돌아갈 것을 잊으신 듯하였다. 나에게 이런 뜻을 적어주기를 바라시기에 내가 이르노니 “흰 것이 채색을 받음은 천성이요, 돌보다 굳은 것은 지조라. 내가 받은 채색 흰바탕으로써 나의 돌 같은 지조를 갈고 닦아서 애당초 하던 일을 돌이켜 흰 바탕을 숭상하고 천부의 근본을 지키고저 돌을 베게삼고 저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여 은총을 놀랜 듯이 사양하고 아무 근심 없이 숨어 지내니 어찌 정자를 이름한 뜻과 터전의 이름이 꼭 들어맞지 않으리오. 비록 그러나 산수는 어진 성품과 총명한 지혜가 없는 자는즐거울 것이 없으며 강산은 호걸을 기르되 그 시대와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또한 운수이거늘 어찌 백석이 황석과 같지 않음을 알 것이오.”라 하였다. 공께서 이르시기를 “그대의 말이 어찌 지조를 말하여 분별하는가? 내 미치지 못하던 바라.”하고, 청하여 정자벽에 써서 걸으시고 스스로 살피리라 하시었다.

 

<白石亭重修記>
琅城東墨井 故吾先所居庄 四遠皆高山巖洞 洞中諸峯 如筆鋒 屈曲長川 繞墨井左 而深處黝然墨色 其石皆白 盤者爲磯 壁立者爲嶂爲屛 枕水而捍湍者 爲砥柱 就其中最高而突兀者 可以爲亭坮 盖山中一奧區而松楸累百年 先隴之下 子孫環墨井而室者若碁置 地狹僅場圃 其間莫有能爲遊觀之所者 至吾伯父石亭公 遯跡丘園 雅有漱石之志 一日睠白石之最高者 而異之曰 選勝夫 何遠去求 吾室不數百武而在吾杖屨中 可亭于其上 遂剔蘇而磨礱其稜角 石色逾白 輝山映水 與蒼翠倒影相涵 眩晃 殆不可狀而槩言之一掌樣也 而衡可四五尺 縱半之高 可數十丈 圍居十之八九 隱若千尺 龍腰半出水 窈冥中蜿蜒 而上而其 頭 昴然向空 無地着手 拮据 公迺先搆一屋子于胸中而後 召巧匠命焉 亭凡六楹 五楹仍礎以白石 至其竪柱之無處 無加奈何則  斲木而刻畵爲一獅子 足踞嵁巖而以背負檻 努眼竦立 其縹緲 若神扶鬼護而其彷彿 又可以駴魚龍而讋虎豹也 締搆之力 賴此而牢固然後 覆以瓦 丹雘其楣榱 而廚房軒窓 靡不畢具 所謂空中樓閣也 旣成而落之 曰 自吾先閱百年許 而亭于今日 其有待也 已乃繚亭以坮下臺 而又爲亭下釣坮 垂楊杏蒲之湊 素壁紆而楓柟列 蒼潭迴而菱茨癸 其石頭之昻然向空者 眼前突兀 此亭之所繇基 而始爲遊觀之所也 伯父素不善飮 好置酒 罌一勺一 一葉釣艇一竽一簑笠 在亭上下 憑闌而投餌 玉尺撥刺尊俎 之間 佐洒之肴 不常蓄焉 公又好琴 琴一琴譜一 亦在亭而庋之 每花之朝月之夕 漁歌樵唱輒拊琴相和 客至命釂 興發乘舟沿洄而取適 至是而公 得餉丘園之趣 而眞樂日益深 名聞日益播 在廷公卿謂公 世祿當仕輦殼 不當老丘園 薦剡之不已 旣不獲辭 則亭始空而京 師之大夫士見公 以上澤臞 獨不爲塵容俗狀也 而曰是爲白石亭主人翁耶 就而聞 石之瓌 亭之妙 而公迺仕退之暇 卽募工畵亭爲簇 一時之工于詩而述其事者 無慮累十章 松坡李公 尤見欽賞 至有應知紙庫客 自愧畵廚身之語 公亦戲笑 相謂曰 今子得非孔稚圭也耶 靡子詩 吾且歸 毋以馳烟之移也 公旣歸 復臥于亭 杖而逍遙者 殆將十年 所奉諱以來 亦已三 十年餘而 公之子若孫 知公平日所愛 雖靡平泉遺誡 一草一木 今猶無恙而亭則居然已三世矣 歲月之寢久 風雨之飄搖 向之翼然者 幾乎隤然 則公之淸塵遺躅 日就湮滅 而後人所愴慕而 重欲修飾者 亦善述中一事 公之孫氵述 愾然涕泫曰 吾祖刱而屬吾父 吾乃孫也而不能守 其肯曰乃有孫 遂罄橐于亭而葺之 不愆于素 無侈于觀 誠可謂石亭公之孫也 噫 始亭于白石 在于丁巳 去今六十年 代謝凋零 奄及喬梓 而獨斯亭 巋然若魯殿之靈光 眷顧亭下 文濟之彷徨 不能忘 亦猶幼度之於東山也 且以余所聞 李贊皇松風醒洒石 白家之夏天床石 詎不磊磊章顯哉 不易世而墮于兵塵 落于它手 不終屬于其兩家之孫也 今斯亭之白石 亙萬祀不崩不騫 亭亦新而舊 舊而重新 公之子孫 仍而雲 雲而復仍 而世守之 白石公之名 永不朽矣 雖然余有一說所可勉者 倘或大風吹倒亭子 卽更掀却臥房술也 於是時 可能露地睡乎 晦庵朱夫子 謂似此方 是眞正英雄人 而却是戰戰兢兢 臨深履薄處 做將出來 
余記亭之始 終以朱夫子之言  俾刻之白石  英祖 十三年 丁巳 春    猶子 文濟 記

 

【번역문】
낭성 동쪽 끝 묵정은 예로부터 나의 선조께서 사시던 고장으로 사방 멀리 높은 산이며 험하고 깊은 골로서 동중의 봉우리는 붓끝같이 날카롭고 꾸불꾸불한 긴 냇물이 묵정마을 왼편을 둘러쌌는데 깊은 곳은 검푸른 먹빛이지만 냇가의 그 돌은 모두 흰색으로 소반같이 판판한 것은 낚시터가 되고 벽같이 서있는 것은 급히 흐르는 여울을 막아 돌기둥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이 우뚝 서 있는 것은 정자터가 될 만하니 대개 수백 년 된 소나무며 가래나무가 어우러진 산 속의 으슥한 한 구역으로 선대께서 가꾸시던 언덕 아래다. 묵정 둘레에 자손의 집들이 바둑 놓이듯 하였는데 지역이 좁아 겨우 마당과 채마밭 정도이니, 그곳에 능히 즐기며 볼만한 곳은 없으나 나의 백부 백석정공(白石亭公)께서는 구원에 자취를 숨기셨으니 돌을 베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할 뜻이 있음에서였다. 하루는 백석이 최고인 것은 돌아보시고 이상히 여기시며 이르시기를 “좋은 곳을 찾으러 어찌 멀리 가리오. 내 집에서 수백 무도 안 되는 시내가 지팡이 짚고 다니는데 있으니 그 위에 정자를 지으리라.” 하시고, 드디어 이끼를 걷어내고 뾰족뾰족한 능각을 갈아 다듬으니 그 돌 빛이 한껏 희어서 산이 빛나고 물에 비쳐서 푸른 절벽과 더불어 거꾸로 선 그림자가 함께 잠기니 눈이 부시어 거의 형상을 구별치 못하겠는데 대략 한 손바닥 정도의 모양이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 백석은 가로가 너댓 자는 되고 세워서 반의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며 둘레의 십중팔구는 거의 천자나 물속에 감추어진 듯 용의 허리가 반쯤은 물 위에 나와 있고 나머지는 깊은 물속에 또아리처럼 사리고 그 머리는 하늘을 향하여 위로 높이 쳐든 것 같은 형상이라. 그러므로 이런 곳에 손을 대어 일을 할 수 없었으나 공께서는 먼저 한 집을 마음속에 지어 놓으시고 일 잘하는 대목을 불러 명하시었다. 정자는 모두 여섯 기둥인데 다섯 기둥은 그대로 백석을 주춧돌로 썼으나 나머지 한 개의 기둥은 세울 곳이 없으니 어찌할 수 없는지라. 곧 나무를 깎아 한 마리의 사자 형상을 새겨 이를 주춧돌로 쓰니 그 발은 험한 바위에 걸치고 등에는 난간을 짊어진 채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서있는지라. 그 표묘한 거동이 마치 신이 돕고 도깨비가 지키는 듯하였으며 또한 고기와 용을 놀라게 하고 범과 승냥이를 두렵게 하였다. 정자 세우기에 온 힘을 기울여 이와 같이 견고히 한 다음 기와로 지붕을 덮고 인중방이며 서까래에 단청을 하고 부엌과 방을 꾸미며 마루를 놓고 창을 달으니 갖추지 않은 것이 없어 이른바 공중누각이 되었다. 이제 다 이루어 낙성을 보게 되니 이를테면 나의 선세로부터 백 여년이 지났지만 오늘에야 정자를 갖게 되니 그 또한 기다리던 것이라. 이미 돈대 아래 터를 잡아 정자를 지어놓고 또한 정자 밑에 낚시터를 마련하니 그곳에는 수양버들 살구나무 창포 등이 모여 있고 소박한 절벽에는 단풍나무 녹나무 등이 어우러져 있으며 푸른 못가를 빙 돌아 마름모 가시연밥이 피어 있는데 백석의 머리는 하늘을 향해 높이 쳐들고 눈앞에 우뚝 내밀고 있으니 이제 이 정자는 풍류의 터전이 되어 비로소 즐기고 볼 만한 곳이 되었다. 백부 께서는 본디 술을 즐기지 않으셨지만 항상 술을 준비해두기는 좋아하시어 술항아리 하나 술잔 하나, 한 조각 낚싯배와 도롱이와 삿갓 한 벌을 정자 위아래에 두시고 난간에 기대어 낚시에 미끼 달아 못에 던져서 낚아 올린 옥척의 고기가 술통과 도마 사이에서 팔딱팔딱 뛰는 것으로 안주를 삼으셨으며 항상 안주는 미리 준비하지 않으셨다. 공께서는 또한 거문고를 좋아하시어 거문고 하나와 거문고 악보 하나를 역시 정자 시렁에 얹어 두고 매양 꽃피는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이면 고기잡이 노래며 나무꾼의 창을 문득 거문고에 부쳐 서로 화답하시었다. 손님이 오시면 술을 권하시고 흥이 나시면 배를 저어 물을 따라 흐르기도 하고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며 취적하시었다. 이와 같이 공께서는 풍류의 구원(丘園)에 취미를 얻어 누리시는 진락(眞樂)이 날로 깊어지셨는데 이를 기리는 소문이 날로 퍼져 드디어 조정의 공경대부들이 듣고 공에 대하여 이르기를 “대대로 녹을 먹는 집안이니 의당 출사하여 연수레를 타야 하거늘 풍류를 탐하여 구원에서 생을 보냄은 부당하다.”라 하며, 끊임없이 날카롭게 천거함에 마침내 더 사양하지 못하고 비로소 정자를 비우고 서울에 가셨다. 경대부며 선비들이 산과 물로써 여위신 공의 모습을 보고 “진세에 묻힌 형용이니 속세의 형상이 아니다.” 하고 아뢰되 “이 분이 백석정의 주인옹이 되시는가?” 하고 백석의 큰 모양이며 정자의 묘한 것들을 자세히 들었다. 그 후 공이 잠시 벼슬에서 물러난 여가에 곧 화공을 불러 정자를 그려서 족자를 만드셨는데, 그 때 글 잘하는 선비들이 시를 지었으니 그 일을 밝힌 것이 무려 수십 장이나 되었다. 이 때 공은 역시 희롱하여 웃으시며 상대에게 이르기를 “이제 자네가 어찌 공치규(孔稚圭)를 일러 말함이 아닌가? 자네의 시가 아니어도 나 또한 돌아가서 산신령이 연기를 보내어 변하게 함은 없으리라.”라고 하시었다. 공께서는 그 후 오랫동안 관직에 계시다가 드디어 돌아오시어 다시 정자에서 쉬시며 지팡이 짚고 소요하시기 10년을 지내셨고, 제사를 받들어 온지도 이미 30년이 넘게 되었다. 공의 아들과 손자들은 공이 평생 사랑하시는 바를 알아서 비록 평천(平泉)의 유계(遺戒)와 같이 공이 남기신 계명은 없다지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이제 오히려 근심할 것이 없다하나 정자는 그럭저럭 이미 3세대가 지났다. 잠자듯 오랜 세월이 흘러 그동안 정자는 비바람에 나부끼고 흔들리어 그전엔 날아갈 듯 산뜻하던 모습이 거의 무너질 듯하니 공의 맑은 심지와 그 남은 자취가 나날이 흙무더기 깎이듯 함에 후인이 슬퍼하고 흠모하는 바이라. 이를 거듭 수리하고 가꾸는 것은 또한 자기가 할 일을 찾아하는 한 가지 큰일이라. 공의 손자 화은처사공께서는 한숨 쉬며 눈물 흘리고 말씀하시길 “나의 조부께서 창건하시어 나의 아버님께 이어 내려 왔거늘 내 곧 손자로서 이를 지키지 못하면 그 어찌 후손이 있다고 말하리오?”라 하시고, 마침내 전대를 털어 정자를 고치고 지붕을 이어 놓으니, 본디 모습에 어긋나지 않고 사치스럽게 보이지도 않으니 참으로 백석공의 손자라 하리로다. 오호라! 처음 백석에 정자를 지은 것이 정사년으로 이미 60년이 흘렀으니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시들고 허물어진 것이 흘연히 부자손의 상승의 도리가 이루게 되어 중수를 마치고 이제 문득 높이 우러러 보게 되니 이 정자가 홀로 우뚝하여 마치 노나라의 영광전과 같도다. 정자 아래를 돌아보며 문제가 방황하고 못 잊어 하는 것은 역시 어린 시절 산동에서 지낸 일이 생각나기 때문이리라. 또한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찬황(李贊皇)의 송풍(松風)과 성쇄석(醒洒石), 그리고 백씨가의 여름철 하천상석(夏天床石)은 어찌하여 첩첩이 밝게 빛나게 대를 이어 물려지지 못하고 병탄으로 무너지고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마침내 그 두 집 자손에게 이어내리지 못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제 이 백석정은 만년을 뻗쳐 흐를지라도 무너지지 않으며 이지러지지도 않을 것이요, 정자 또한 새로 지으면 오래되고 오래되면 거듭 새로이 지으며 공의 자손은 후손이 후손을 두고 그 후손이 다시 후손을 두어 대대로 이 정자를 지켜가면 백석정공의 이름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리라. 비록 그렇더라도 내가 한 마디 권할 것은 아마 혹시 대풍이 불어 정자가 쓰러지게되면 곧 다시 세울 사람은 도리어 두 갈랫길에 누운 화은처사공이리라. 이런 때에 과연 이슬땅에서 잠잘 수 있겠는가? 회암 주 선생이 이르되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이는 곧 진정한 영웅이라 하였지만 이런 일은 깊은 물에 이르고 얕은 얼음을 밟는 것처럼 몹시 두렵고 조심스러운 것이다. 나고 들어옴을 일으켜서 내가 이 정자의 처음을 기록하였고 이제 주 선생의 말씀으로 이글을 맺고 백석에 깊이 새기려 함이라.

 

 

<白石亭記>
亭名白石以白石也 石本天成 古白而今亦然 然白石之名 自亭立始 當其未立 孤撑盤陀爲高掌 呀頂可以寄足 是則造物者 搏攫而有待 有芝潭申公 杖屨偶及 徘徊嘯詠曰 此可亭也 至芝潭之子 主簿公 繼而成其志 遂命之名 於是國之人 或不曾足躡目寓 而知淸之州有 白石者 在物之遇不遇如是 夫記 昔不佞從亭下過望之 若鶻栖燕巢 危而不墜 不問可知 爲申氏亭也 乃扳躋而上 凭欄俯流 爲之一暢 迄三十年于玆 未嘗不往于中 比之 良友之睽別 人有自淸來者 必先訪其無恙 曰然 心便喜如云 風雨之所磨 樵牧之所觸 不免有少廢 輒以之不怡也 今有從姪孫光甫進士 慣與申氏子弟遊爲 余道主簿公 有孫某甫 慨然感歎曰 今年丙辰 卽上距刱亭之歲 甲子已周 舊蹟隨堙 吾豈敢不事事 遂悉心殫力 棟宇丹雘 一新無憾 余謂申大姓也 世有傑鉅人 爲州之望 傳之雲仍 殆與石並立而不毁 如某甫者 其能循循 雅飭 有舊家餘俗歟 曰然 其能從事于文學 思有以上紹前修歟 曰然 然則亭之重葺也 非亭也 志有所存 則事有所託 事有所託 則必於物取之 故修其亭 乃所以修其緖業 申氏名德之 後 又可以卜其益昌行 將以石爲息壤   星湖 李瀷 記

 

【번역문】
정자의 이름이 백석(白石)인 것은 흰 바위 때문이다. 바위는 본래 하늘이 이룬 것으로 옛적에도 희었고 지금도 역시 그렇다. 그러나 백석의 이름은 정자가 세워지고부터 비롯되었으니 정자가 세워지지 않았을 때는 외로운 지주가 울퉁불퉁 고장(高掌)과 같아 그 꼭대기는 겨우 발붙일 만하니, 이것은 조물주가 웅켜 쥐고서 주인을 기다린 것이다. 지담(芝潭) 신공(申公)이 지팡이를 끌며 우연히 이르러 노래하며 배회하다 이르기를 “이곳은 정자를 지을 만하다.”고 하였다. 지담공의 아들인 주부공(主簿公)에 이르러 그 뜻을 계승하여 이루고 마침내 백석이라 이름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일찍이 발로 밟고 눈으로 보지 않고서도 청주에 백석정이 있는 줄을 알게 되니, 만물이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이 이와 같다. 대저 기문을 적으니, 옛날 내가 정자 아래를 지나다가 바라보니 매나 제비의 둥지와 같이 높이 걸려 있으면서도 떨어지지 않으니, 신공의 정자임을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정자에 올라 난간에 의지하여 물줄기를 굽어봄에 한바탕 상쾌했다. 이에 30년이 흐르도록 이에 왕래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비유하자면 좋은 친구와 이별하는 것과 같았다. 청주에서 오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찾아가 별탈이 없는지를 묻고 그렇다고 대답하면 마음이 곧 기뻤다. 비바람에 깎이고 초동과 목동의 손길이 닿아 조금씩 훼손됨을 면하기 어렵게 됨에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이제 종질손인 진사 광보(光甫)가 신씨 자제들과 어울려 노님에, 내가 주부공을 말하니 손자인 아무개가 개연히 탄식하며 말하길, “올 병진년으로 정자를 지은 지 이미 60년이 지났습니다. 옛 자취가 인멸됨에 따라 제가 어찌 할 일에 힘쓰지 않겠습니까? 마침내 마음과 힘을 다하여 기둥과 단청을 일신하고서야 유감이 없게 되었습니다.”라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신씨는 대성이다. 대대로 뛰어난 인물이 있어 고을의 우러르는 바가 되었으니, 자손에게 전함에 아마도 백석과 함께 나란히 서서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와 같은 사람은 일을 차례차례 행하여 집안의 여속(餘俗)이 있게 할 수 있는가?”라 하자,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또 “글을 지음에 종사하여 조상을 이어 가꿀 생각이 있는가?”라 하자,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정자를 중수하는 것이지 정자를 세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뜻을 가지고 있으면 일이 의지할 바 있게 되고, 일이 의지할 바 있으면 반드시 만물에서 그것을 취하니, 그런 까닭에 그 정자를 중수하는 것은 곧 그 유업을 가꾸는 까닭이다. 신씨의 명덕(名德)의 후손들이 또한 더욱 번창할 것을 백석으로 식양(息壤)처럼 굳게 약속한다.

 

 

<白石亭重修記>
亭之有記 尙矣 夫勝地未嘗自擅 而人爲之倡名 名亭不能尙存 而修舊而新之 凡天下名樓大觀 必題號而記之 輝暎湖山 傳之永遠者此也 淸州東琅城 古稱山水之秀麗 墨泉之左有花川 花川之匯有白石 盤踞乎水中 峙立爲山麓 昻然高十數丈 磅礴而縱橫僅六七步 俯可以挹淸 仰可以凌虛 眞洞天奧區也 昔我傍祖主簿公 以軒冕世閥 雅有丘園之趣 作亭於其上 仍以自號 爲登臨游觀之所 盖化翁遺巧於名區 而非其人 不能著其妙 逸士耽奇於壯觀 而非其地 無以暢其懷 有相遇而然 距今數百年餘 未嘗遞主 雲耳世傳之 噫 平泉水石 有謹守之誡 弇園花竹 有展覽之譜 古人之於名勝 垂後久遠 有如是夫 亭之刱立 竹軒公作記 後六十年 花隱處士公修葺 龍溪公有重修記 若其景致之美 已爲備述 無容贅附 而星霜屢移 風雨漂零 斯亭之觀 非復舊矣 巖間躑躅 石逕楓柟 不殊昔日之壯觀 釣臺斜陽 漁艇明月 徒增後人之愴感 嗚呼 洛陽名園 誰問花事之盛衰 西京亭子 遽爲大風之吹倒 奈彼造物者劇戱 有非人力之挽回 登斯亭而窃有興替之感 然而靑山依舊 綠水長存 蒼然老石 捏不緇 磨不磷 若頹波之砥柱 如知公之名 與此石而俱傳 石之壽 閱千劫而無窮 亭之號 鑿鑿然不傾不泐 長爲湖西之環觀 與晉陽之矗石 關東之叢石 倂美齊名 而但恨棟桷之傾者久 修完無人 幸本孫宗求 嘗有肯搆之志 醵金而殖之 度材而經之 迺以丙寅五月日 營始董工 階砌之頹圮者 築而完之 苔䔟者 剔而新之 六楹離立於水中 宛游龍之翹首 依樑矯擧於山脊 若飛鳥之撲翼 丹崖翠壁 儵改觀而生輝 樓號楣字 遂仍舊重新 信乎勝地之有主 亭名之後著 遺蹟之不泯 竪拂作記 以諗夫來斯 使後之後人 有以知何代之刱立 何人之重修 益 
勉肯搆謨云   檀紀四二五九年 丙寅 春   傍孫 興雨 記

 

【번역문】
정자에 기문이 있음은 거의 모두가 이를 높이어 자랑하고자 함이라. 대개 승경지라 하면 그것이 제 스스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이를 위하여 이름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름난 정자라 할지라도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래 되면 고쳐서 새롭게 되는 것이다. 무릇 천하에 이름난 누각이며 대각은 반드시 제호가 있고 그 뜻의 기문이 있어서 강호와 산봉에 그 빛이 비치어 영원히 전하는 것이 모두 이 때문이다. 청주 동쪽 낭성(琅城)은 예로부터 산수가 수려하다고 일컬어지는 곳으로 묵천(墨泉) 왼편에 화천(花川)이 있고 화천물이 흘러내리는 곳에 백석(白石)이 있는데 이 돌은 물속에 사리고 걸터앉아서 위로 치솟아 산기슭이 되었으니 올려보면 그 높이가 열두어 길이 되고 울퉁불퉁한 그 돌의 가로세로는 겨우 6, 7보인데 구부리면 맑은 물을 움킬듯하고 우러러보면 하늘을 능멸할 듯하니 참으로 깊은 골 하늘이요 으슥한 오지로다. 그 옛날 나의 방조 주부공께서는 대대로 수레와 면류관의 높은 문벌이셨는데 본디 구원에 취미가 풍부하시어 정자를 그 위에 지으셨고 그 정자명을 그대로 자호로 하셨으며 거기에 오르시어 즐기는 곳으로 삼으셨으니 대체로 늙어서 공교한 자취를 이름난 곳에 남기되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면 그런 묘한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요 일사는 기이한 것을 장관에서 즐기되 그럴만한 곳이 아니면 그 회포를 풀지 못하는 것이다. 서로 만남이 있어서 그렇다지만 지금부터 수백 년이 지났어도 그 주인이 바뀌지 않은 것은 후손이 대대로 받들어 전해주어 그렇게 된 것이다. 오호라! 평천(平泉)의 수석은 삼가 지켜나가라는 유계(遺戒)가 있었고 엄원(弇園)의 화죽은 전람하는 보책(譜冊)도 있었다고 하니 고인의 명승도 뒤를 이어 오래되면 이 같은 일이 있을진저. 정자를 창건하던 때는 죽헌공(竹軒公)께서 기문을 지으셨고, 그 60년 후 화은처사공(花隱處士公)께서 수리하셨을 때는 용계공(龍溪公)께서 중수기문을 지으셨으니 그 경치의 아름다움은 이미 다 기술하신지라 이에 덧붙여 더 나타낼 것이 없고 그간 많은 세월이 흘러 이 정자가 비바람에 씻기고 허물어져도 그 경관을 복구하지 못하였지만 그 주변 바위틈의 철쭉이며 돌길의 단풍, 녹나무 등은 지난날의 장관과 다르지 않고 낚시터에 비친 햇살이며 고깃배에 비치는 밝은 달은 한갓 후인에게 슬프고 허전한 느낌을 더하게 하였다. 아아! 낙양의 그 이름난 동산의 화려했던 성쇠를 그 누구에게 물으리오. 저서경의 정자는 대풍이 불어 졸지에 쓰러졌으니 조화옹이 희롱하여 농락함을 어찌하리오. 과연 인력으로는 만회하지 못할진대 이 정자에 올라서도 흥체의 느낌이 간절하도다. 그러나 청산은 옛날과 다름이 없고 녹수도 길이 흘러가는데 노석은 창연하여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며 갈아도 닳지 않으며 무너뜨릴 듯 흘러내리는 물결의 지주석과 같아 백석정의 이름이 이 돌과 더불어 전해짐을 알겠다. 이 백석의 수명은 천년을 지나도 무궁할 것이며 정자의 호도 기울어지지 않고 돌결 일지 않고 선명하게 길이 호서의 옥고리같은 집이 되어 저 진양의 촉석루와 관동의 총석정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함께하고 이름을 가지런히 할 것이다. 다만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기둥과 서까래가 무너진 지 오래되었으나 보수하여 온전히 하는 이가 없더니, 다행히 본손인 휘 종구(宗求)가 다시 일으킬 뜻을 세우시고 추렴을 거두어 이자를 불리고 재목을 헤아려 이를 설계하더니 마침내 병인년 5월 아무날에 목수를 감독하여 짓기 시작하는데 무너진 섬돌을 모으고 쌓아서 온전히 하고 시들은 이끼를 긁어내어 새롭게 하고 여섯 기둥을 물에서 떼어서 세우니 백석은 마치 헤엄치는 용이 머리를 번쩍 쳐든 것 같은데 대들보를 높이 들어 산마루에 걸쳐 놓으니 나는 새가 부딪칠 듯하다. 꽃피어 붉은 낭떠러지와 대나무로 푸른 절벽은 갑자기 빛이 나고 달라 보이며 정자의 호와 인중방에 걸린 기문은 드디어 옛 모습대로 다시 세워졌으니 진실로 명승지에 주인이 있음이라. 정자의 이름은 오랜 후에까지 나타날 것이며 이곳에 남겨진 지난 자취가 없어지지 않을것은 내세우고 또는 떨쳐 드러내고 하여 기문을 지어 지난 일을 고하고 알리는 바이니 후손의 후손된 이는 이 정자를 어느 대 할아버님께서 창건하셨으며 어느 할아버님이 중수하셨는지를 잘 알아서 더욱 힘써 수호 관리를 도모하도록 일러두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