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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남일면 가산리 한란신도비(南一面 駕山里 韓蘭神道碑) 본문
【번역문】
시조태위공신도비명
인류가 생기면서부터 부자가 있게 되어 있고 부자가 있어서 낳고 또 낳아 연속하여 감으로 천만 년이라도 세대를 이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연대가 아득히 멀어지고 서자(書字)로써 기록된 증거가 없으면 하는 수 없이 들은대로 본대로 그 세대일을 기술하는 것도 또한 자연스러운 사세이다. 우리나라 대성(大姓)에는 반드시 한씨(韓氏)를 지칭하게 된다. 은태사(殷太師, 기자)가 우리나라에 와서 그 후손 중에 성을 얻은 자가 3인인데 한씨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후 천수만 년을 지나 태위공(太尉公) 때에 이르러서 비로서 호서지구인 청주에 정착하셨으니 이 어른이 바로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시조가 되시니 대체로 옛날부터 전하여 오는 말과 고적을 살펴 보아서 확연히 알 수가 있는 바이다. 부군(府君)의 휘는 란(蘭)이니 고려 태조를 보좌한 공훈으로 벼슬이 태위삼중대광(太尉三重大匡)에 오르고 이름이 벽상공신(壁上功臣)에 기록되었다. 선대로부터 전하는 말에 따르면 태위부군께서 무농정(務農亭)에 살면서 농사에 힘을 써서 수만 석의 치부를 하였더니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러 가는 행군이 청주를 지날 때 마침 군량이 떨어져 사졸들이 끼니를 거르게 되었다. 이 때 부군께서 무장을 갖추고 이를 맞이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삼군(三軍)을 배불리 먹이고 사기를 북돋운 후에 바로 종군하여 극력전공을 세워 고려 500년 왕조의 터전을 다졌으니 참으로 위대하시다. 부군께서 적덕(積德)하고 누인(累仁)하시어 원래 당세에 특출하신 인품으로 참다운 군주를 만나 의지가 상통하였고 나아가서는 그 여음(餘蔭)을 후세까지 끼쳐서 크게 자손들의 앞길을 열어주시어 개국한 이후 명성이 높은 공경대부와 덕망이 높고 공훈이 큰 위인이 대를 이어왔고 그 밖에도 세련된 명행(名行)이 일세의 사표가 되며 뛰어난 인재가 많았다. 이조(李朝) 때에 와서는 더욱 대창하였다. 여섯 분 성녀(聖女)를 탄육(誕育)하여 왕비가 되시니 명망거족이 한층 더 문호가 빛나게 되었다. 경민공(景敏公) 경은(卿) 신의왕비(神懿王妃)를 탄육하셨고 양절공(襄節公) 확은(確) 소혜왕비(昭惠王妃)를 탄육하시고 충성공(忠成公) 명회(明澮)는 장순(章順), 공혜(恭惠) 두 왕비를 탄육하시고 양혜공(襄惠公) 백윤(佰倫)은 안순왕비(安順王妃)를 탄육하시고 문익공(文翼公) 준겸(浚謙)은 인열왕비(仁烈王妃)를 탄육하시니 우리나라 억만 년의 왕자, 왕손이 실은 부군의 후예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깊은 물은 흐름이 긴 법이다. 부군께서 가신 지 거의 천년에 위대하신 덕행을 일일히 알 수는 없으나 이것만을 보더라도 그 만분의 일이라도 신빙할 수 있으니 참 거룩하도다. 청주 동남쪽 10리 지점에 방정리(方井里, 청주시방서동)가 있으니 부군께서 당시에 복거(卜居)하신 구지(舊址)요. 방정리에서 남쪽6, 7리 쯤 가산(駕山) 남쪽 건좌(乾坐)에 부군의 묘소가 있다. 중간에 실전(失傳)이제 되어서 타인들이 모점(冒点) 봉분(封墳)이 형태가 없어지고 묘역을 찾을 길이 없었다. 만력(萬曆) 을사년(1605)에 후손 백겸(百謙)이 청주목사로 와서 방정유허에 단을 축조하고 세일제(歲一祭)를 봉행할 것을 건의하니 충정공(忠靖公) 응인(應寅)이 크게 찬성하였다는 사실이 준겸(浚謙)이가 쓴 비문에 기재되었다. 슬프다! 사람의 행위가 아무리 요사하더라도 천도(天道)는 지공무사(至公無邪)하다. 때라 굴신(屈伸)있어 잠시간 사기행위가 용납된다고 하더라도 군자의 유택(幽宅)이 끝내 사라지고마는 이치가 없는 법이다. 아무 산 어느 봉에 누구의 묘라는 것이 노인들의 지난날 듣고 본 고담(古談) 속에 자연히 흘러나오게 마련이고 버린 비(碑) 돌 옛날 각자(刻字)라도 여러 해 깎이고 부서지다 남은 비편(碑片)에서 살펴 볼 수가 있으며 동네 부인들 중에서도 여기가 누구의 묘라든가 저것이 뉘집 산소라든가 지목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인조 무자년에 후손 청녕군(淸寧君) 덕급(德及)이 청주목사로 와서 처음으로 찾아보았고 숙종 기사년에 참판 성우(聖佑), 장령 영(濙), 군수 숙(塾)이 같이 나서서 관청에 제소하니 조정에서 경조랑(京兆郞)을 파견하여 흙을 파본 즉 부장품 등 확실한 증거물이 나오므로 범인은 사실을 자백하였다. 이제야 모장(冒葬)한 것들을 파서 옮겨버리고 여러 자손들이 나가서 봉분을 쌓고 묘역을 깨끗이 정돈하였다. 이것이 부군 묘소의 잃었다 찾은 내력이다. 부인은 송씨(宋氏)이니 송씨는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인데 본관을 알 길이 없다. 오호라, 천지가 감응하는 이치에 따라 모든 사물이 품류가 이루어지는 법이다. 부군께서 복을 쌓으신 은덕으로 천년이 지나도록 자손이 더욱 창성하는 것이니 어찌 유래한 뒷받침이 없다고 하랴. 갑신년에 여러 자손들이 상의하기를 우리 시조의 높으신 덕행으로도 아직까지 묘비가 없으니 이는 곧 종중의 큰 수치가 아닌가? 천만년 후에 높은 언덕이 골이 되고 깊은 골이 언덕으로 변할 경우를 상상한다면 더구나 표식을 아니 할 수 없고 또는 이미 겪은 일이 오래되지 않아서 단단히 경계하여야 될 일임을 알고 남음이 있는데 어찌 영원히 전시(傳示)할 계책을 강구치 않으려는가 하니 모두 크게 찬성하고 서로 서둘러서 자금을 거두고 돌을 다듬어서 묘 옆에 세우고 이런 사실을 기록하니 감히 선조의 위덕(偉德)을 선양하였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장차 다음 세대의 자손에게 길이길이 알리는 바니 부군의 후손되는 사람들은 이것을 거울 삼아서 항상 분발하고 면려(勉勵)할지며 위로는 선조의 적덕루인(積德累仁)하신 공을 추모하며 아래로는 후손이 계승하여 지켜나갈 길을 염원하라. 오직 충효와 덕례(德禮)로써 그 행동을 착하게 하고 또 근근(勤謹)하고 공검(恭儉)함으로써 가업을 삼을 것이며 서로서로 훈계하고 충고하며 진실로 착하고 현명하여 우선 제몸 부터 닦고 나아가서는 후인들을 교도(敎導)하라. 항상 부지런하여 게으름이 없이하면 선조에 대한 보답과 자손에 대한 도리가 모두 유감이 없을 것이요. 우리 선조의 적덕하신 응보(應報)가 결코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시전(詩傳)에 이르기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 잠들 때까지 네 부모에게 욕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자식을 잘 가르쳐서 좋은 길로 인도하라.’ 하였다. 아 후손들이여! 더욱 더 힘쓸지어다. 명(銘)하여 왈 기자 후예 삼파(三派)인데 그 중 일파 한씨로다. 동방으로 오신 뜻은 주(周)의 신복(臣僕)을 꺼림이라. 오복(五福)을 거두어서 자손에게 전해 주니 이천 년을 연이어서 부군 세대 이르렀네. 좋은 터를 골라보니 청주 땅이 제일이라. 수리(水利)도 풍요하고 넓은 들이 기름지네. 무농정이 내 집이요. 방정리가 내 터인데 몸소 내가 농사지니 오곡백곡 쌓였구나. 팔도강산 소란하여 때는 마침 말세인데 초야에 묻혀 살며 때오기를 기다렸네. 고려 태조의 남벌(南伐) 군사(軍師) 청주 땅을 지날 적에 군문찾아 상봉하니 그 연분이 두텁구나. 군량없다 걱정마소 내 창고에 쌓였노라. 주린 군사 포식하니 군기가 일신하다. 드디어 종군하여 대훈업을 이루어서 벽상공신되셨으니 보다 큰 공없으리라. 아들 손자 연이어서 공경대부 배출하니 고려 왕조 오백 년에 시종을 같이했네. 이조시대 이르러서 더욱 창대하였으니 사록산(沙麓山)에 서기어려 왕운(王運)이 연이어서 한 가문에 6왕후가 고금에 또 있던가? 높은 선비 어진 재상, 일등공신 유덕군자(有德君子), 전후 고금 연이어서 한정없이 배출하니 적선하신 그 음덕이 자손에게 미침이다. 줄기 깊은 물과 같이 뿌리 굳은 나무같이 한 사람의 심은 덕이 천만자손 복이 되어 사농 간에 하는 일이 모두모두 유택일세. 피가 같은 일가들아 조상의 덕 잊지말고 아침 저녁 부지런히 유업계승 바라노라. 산소에는 아직까지 비석을 못세웠네. 한 사람이 제안하자 여러 일가 찬동하여 돌을 깎아 다듬으니 그 높이가 8척이라 이에 글을 새기어서 영원토록 밝히노라.숭정기원후삼무자 월 일 후손 우의정 익모 찬 형조판서 광회 서 좌윤 덕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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