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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 호명리 인동장문충효각(北二面 虎鳴里 仁同張門忠孝閣)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북이면 호명리 인동장문충효각(北二面 虎鳴里 仁同張門忠孝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4. 2. 12. 08:13

청원구 북이면 호명리 동리입구에 있는 인동장문 충효각입니다.호명리는 본래 청주군 산외이면 지역으로 예전에서부터 호랑이가 울고 다녔다는 설이 있으나 그 사실 여부는 희미하고 주변 큰 산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말이 있다. 특히 삼보산은 그 앞이 마을 뒤가 되는데, 인동 장씨 중시조의 산소를 모신 산 형국이 범의 얼굴 형상을 띠어 그 산형을 따서 호오리라 이름 지어 불러오고 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북이면에 편입되었다. 동은 증평읍 원평리이고, 서는 선암리, 남은 숙정리, 북은 증평읍 남하리에 접해 있다. 호명리의 자연마을은 양달말, 음달말, 새태말이 있다.

 

북이면 호명리에 있는 이 충효각은 1935년에 장경달(張慶達)의 충절과 장문창(張文昌)․장순급(張舜汲)의 효행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충효각은 1935년에 세우고 1990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 장경달․문창․순급 3인의 충효문 편액과 1935년에 최광태(崔光泰)가 지은 효행술(孝行述)과 1936년에 윤녕구(尹寗求)가 지은 포충문(褒忠文)과 송철호(宋哲鎬)가 지은 정려기(旌閭記)가 걸려 있다. 밖에는 충효려(忠孝閭)라고 쓴 현판을 달았다. 

 

장순급(張淳汲, 1823~1892)은 조선조 효자. 본관 인동. 호 지헌거사(止軒居士). 청원군 북이면 호명리 출신. 평생 효경(孝敬)을 다했으니, 어머니의 등에 난 종기를 입으로 고름을 제거하니 1개월 만에 완치되었다. 또 한겨울에 생고사리가 먹고 싶다고 하자 입산하여 눈물로 하늘에 기도하였다. 언 땅에서 홀연히 여러 줄기의 고사리가 솟아나니, 채취하여 어머니의 뜻을 즐겁게 해 드렸다. 아버지께는 늘 갓을 씌어 드리고 머리를 빗겨 드리며, 옷을 입혀 드리고 허리띠를 매어 드렸다. 또 병이 나자 대변의 달고 씀을 맛보아 병환의 더하고 덜한 것을 시험하고, 그 임종에 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먹이나 수(壽)가 며칠간 연장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매우 슬퍼하며 더욱 예를 지켰다. 3년 동안 날마다 묘에 가서 처음 상을 당했을 때와 같이 곡읍(哭泣)하였다. 충효려안에 편액에는 효자학생지헌거사장순급지문(孝子學生止軒居士張舜汲之門)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장경달(張慶達, 1607~1636)은 조선조 충신. 본관 인동(仁同). 청원군 북이면 호명리 출신. 부친은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명천부사(明川府使) 장덕(張德)이다. 본디부터 총명하고 기상은 간단하면서도 무거웠으며 지모가 깊었다. 부모를 섬김에 그 뜻을 극진히 했으며,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맞이함에 예의와 공경을 지극히 했다. 병자호란을 맞아서는, “내가 지금 비 
록 포의(布衣)이나 조상들이 일찍이 다 국가의 녹을 받았다. 이 위란지제를 만나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여러 지방을 돌아 다녀야 하는 때를 당했으니, 어찌 조야에서 말만으로 편히 하며 우리 임금을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지역에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즉시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대공을 세웠으나, 전세 불리하여 마침내 금천(衿川)에서 순국하였다.공의 충절과 후손 장문창(張文昌)․장순급(張淳汲)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35년 청원군 북이면 호명리 153번지에 인동장문충효각(仁東張門忠孝閣)을 세웠다. 충효려안에 편액에는 충신진무공신과의교위통덕랑인동장경달지문(忠臣振武功臣果毅校尉通德郞仁同張慶達之門)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충효려에서 바라본 호명리의 마을 모습입니다.
충효려(忠孝閭)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장문창(張文昌, 1703~1772)은 조선조 효자. 본관 인동. 자 성로(星老). 청원군 북이면 호명리 출신. 의병장 장경달(張慶達)의 증손이며, 부친은 범서(範叙), 어머니는 청풍 김씨(淸風金氏)이다. 유년시절부터 부모를 공경하는 도리를 능히 알았고 자라서는 부모를 봉양함에 곡례(曲禮)대로 실행하였다. 부친이 병이 나자 정성껏 간호했으니, 1년 내내 허리띠도 풀지 않 
고 잠자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 의원을 찾아감에 원근을 가리지 않았고, 대변을 맛보아 달고 쓴 것으로 차도를 시험하였다. 또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 봉양하여 부친의 병을 낫게 하였다. 그 후 부상(父喪)을 당하자 직접 태백산 속에 들어가 좋은 관곽(棺槨) 재료를 구해 등에 지고 고개를 넘어 왔다. 조실부모한 동생을 정성껏 길러 나중에 살림을 낼 때 자신은 척박한 땅을 취하고 동생에게는 비옥한 땅을 주었다. 충효려 안에 편액에는 효자무과급제선략장군오위도총부사장문창지문(孝子武科及第宣略將軍五衛都摠府事張文昌之門)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충효각 건립에 물심양면으로 도운 사람들의 명단과 기부내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