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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면 목계별신제유래비(嚴政面 牧溪 別神祭由來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엄정면 목계별신제유래비(嚴政面 牧溪 別神祭由來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4. 26. 13:01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에서 옛날 뱃길이 무사하고 내륙의 장사가 잘 되기를 비는 민속 의례.

[연원 및 변천]
목계 지역은 충북선 철도가 가설된 1930년대 이전까지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였다. 목계 지역이 남한강 수운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성황을 누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가흥창(嘉興倉)의 설치와 존속에 있다. 가흥창은 1465년(세조 11)에 설치되어 개항 전까지 존속했다. 단양에서부터 영동에 이르는 충청북도 전역은 물론 경상도의 일부 지역에서 전세를 거두어 서울까지 운수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에 대부분의 장시가 5일장의 정기성을 띠게 되면서, 목계 지역의 장시는 관 주도에 의한 상업 활동에 기반을 두고 민간에 의한 상업 활동이 더해지면서 이전 시기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장시의 번성을 위한 목계별신제 행사는 별신굿과 함께 씨름, 줄다리기, 윷놀이, 보부상놀이 등이 펼쳐졌다. 또한 기녀들의 노랫가락이 끊이지 않았다. 타 지역에서 온 사당패(寺黨牌)나 걸립패(乞粒牌)의 연행종목도 목계 지역 장시의 유흥을 돋우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특히 투전, 골패, 남사당놀이 등 유흥 문화의 활성은 경제적인 성장과 함께 남한강 유역 장시 문화의 특성을 드러냈다. 이처럼 지역의 수호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상권의 활성화를 기원하였고, 난장의 한복판에 남사당패를 불러놓고 대규모의 줄다리기를 행했다.

목계별신제는 장별신형 축제로 포구(나루터) 시장의 번영과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였다. 또한 별신제 기간 중에 여러 민속놀이를 통하여 주민들로 하여금 일체감을 불러 일으켜 사회생활을 협동하게 만들어 공동사회의 기능을 유지시켜 나가는 기능을 하였다. 목계별신제는 별신굿과, 줄다리기, 난장의 세 요소가 결합된 민속축제였다. 멀리 영남 지역으로부터 경기, 강원 지역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내는 신명나는 한판의 축제로 중원문화를 만들어내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신당/신체의 형태]
신당은 목계인도교봉제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목조와가(木造瓦家) 양식의 부흥당(富興堂)이다. 원래는 봉제산 아래 삼거리 쪽 길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968년 충주~원주 간 국도 확장 공사 및 한강교 가설 공사로 인해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부흥당까지는 가파른 돌계단을 만들었으며 입구에는 나루터 기념비가 있다.

신체는 그림으로 되어 있다. 서낭각시 신위와 용신 및 산신 신위다. 모두 가로 48㎝×85㎝ 가량의 송판 액자에 테를 둘렀다. 서낭각시는 긴 비녀에 족두리를 썼으며 ‘희(囍)’자를 새긴 붉은 댕기를 앞가슴 밑으로 드리웠다. 용신은 머리에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와 흡사한 두루마기를 걸쳤는데 양 어깨와 가슴 부분에 ‘보(補)’라고 일컫는 금실로 수놓은 오조룡을 붙여놓았다. 산신은 꼬리를 치켜 든 호신과 같이 있는데 흰 도포를 입고 있으며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발목까지 붉은 천을 드리우고 있다. 머리에는 작은 모자를 쓰고 있다.

[절차]
목계별신제는 영신굿-오신굿-송신굿의 순으로 진행된다. 영신(迎神)굿은 봉제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부흥당에 좌정하고 있는 마을의 수호신을 강변에 가설한 별신제의 제장으로 영접하는 의식이다. 행례는 유교식 절차를 따랐지만 집도는 무(巫;고 권무당)가 담당하였다. 무의 주도에 따라 시종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분향-헌작(초헌·아헌·종헌)-독축-소지 등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무(巫)가 수수팥떡을 제장 주위에 뿌려 제장을 정화한다.

오신(娛神)굿은 부흥당의 수호신을 모셔놓고 마을의 안녕을 무당의 축원으로써 기원하는 의식이다. 최근에는 전승의 단절로 부재로 충청북도 농악 무형문화재 이수자인 전봉근의 증언을 토대로 오신굿을 진행하고 있다. 오신굿은 서낭거리, 산신거리, 팔선무, 불사거리, 대감굿, 작두굿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서낭거리는 목계의 수호신인 부흥산의 서낭을 오신의 대상 신격으로 삼는 굿거리다. 목계 지역을 오가는 장사꾼들의 액을 물리치는 데 주안을 두어 축원을 한다. 산신거리는 산신을 오신의 대상 신격으로 삼는 굿거리로 자손의 점지와 자손의 출세, 한 가정의 복락 등을 기원하는 데 주안을 두고 축원을 한다.

팔선무는 서낭이나 용왕 등 목계를 수호하고 있는 여덟 신격을 오신의 대상으로 삼는 굿거리다. 팔선녀를 상징하는 무녀의 단아한 춤을 통해 강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불사거리는 세존불사(世尊佛師), 삼신(三神), 제석신(帝釋神), 칠성(七星) 등을 오신의 대상 신격으로 삼는 굿거리다. 세존불사에게는 현실의 고난이 해결되기를, 삼신과 제석신에게는 자손의 번영과 재수를, 칠성에게는 병액의 구축(驅逐)에 따른 수명장수를 각기 기원한다.

대감굿은 열 두 대감신을 오신의 대상 신격으로 삼는 굿거리다. 자손의 출세를 비롯하여 복락을 기원하는 데 주안을 두고 축원을 한다. 작두굿(장군놀이)은 작두에 오름으로써 잡귀나 잡신을 구축(驅逐)하는 굿거리다. 실제로 원형의 목계별신제에서 남장군과 여장군이 작두를 탔다고 한다. 그리고 송신(送神)굿은 강변에 가설한 별신제의 제장에서 원래 좌정하고 있던 부흥당으로 수호신을 영접하는 의식을 말하며 일체의 의식을 영신굿과 동일하게 진행한다.

[축문]
(維歲次甲申正月戊子朔十四日辛丑牧溪代表者金榮植外三人敢昭告于富興堂尊神本人士奉祝不知幾百載有不可思義者氣儒之漉落精神之嚴威東祀三登南恭蓄瘚名實相符自支洞祭特題筆願田富興堂永之積試餌之久視市井開閉靈應極著衛我士民尊我盤奉陸海恃葳民蒙利樂載我以等氣靘大業永鎭是方以無震利略以雷謹祝其試伏惟尊神 尙饗)

[부대행사]
부대행사로는 당고사, 뱃고사, 목계줄다리기 등이 있다. 이중 당고사는 원래 음력 1월 5일부터 10일까지 지속되었다. 우선 1월 5일 즈음에 단골 무당이 광대와 악사를 대동하고 3일 동안 광대놀이를 하였다. 1월 9일에는 아침부터 각 가정을 돌며 지신을 밟는 등의 놀이를 통해 축원을 하였으며, 밤에는 제관의 집에서 안반(案盤)굿을 하였다. 일종의 전야제 형태의 걸립굿이다.

오늘날에는 제일 당일 해질 무렵 오후 7~8시 즈음에 마을 원로 및 제관 등이 복색을 갖추고 무(巫)와 함께 제장으로 올라 촛불과 향을 지핀 후에 본격적으로 의례를 행한다. 우선 유교식 예법에 따라 제물을 진설한 후, 무(巫)가 부정풀이를 구송하여 제장을 정화시킨다. 제차(祭次)는 시종 엄숙하며 분향-헌작-재배-축-소지 등 유교식 진행이다. 제의 후 약간의 떡을 떼어놓고 하산한다.

목계 지역의 뱃고사는 음력 1월의 정기적인 뱃고사 유형에 해당하다. 무엇보다 제의의 기원을 당해 년 운항의 안전에 두었다. 제일을 정월 특정일로 고정하였으며, 제장을 나루터로 삼았으며, 선주나 뱃사람이 직접 제관이 되어 행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1925~1930년 사이에 중부의 내륙 지역을 관통하는 도로가 개통이 되면서, 또한 충주~조치원충북선 열차가 개통되면서 목계나루의 활기가 점차 시들었고, 1973년에 콘크리트 다리가 가설되고 충주댐이 만들어지자 나룻배도 사라졌다. 이로써 뱃고사도 단절되고 말았다.

목계 지역 자체에서 연례적으로 행했던 골목줄, 동네줄, 애기줄 형태의 줄다리기와 외부 집단의 참여와 더불어 3년마다 행했던 큰줄 형태의 줄다리기가 1946년까지 공존하였다. 목계 지역에서는 3년을 주기로 2월 말 경에서 3월 초순 사이에 줄다리기를 4~5일 동안 행하였다. 인근의 각 동리뿐만 아니라 충주, 장호원, 청풍 등지에서 농악기(農樂旗)를 앞세운 수 만 명의 인파가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현황]
목계별신제의 전승 확보가 어려운 실정이다. 현재는 충주문화원목계문화보존회에서 충주시 축제 기간 또는 목계 마을행사 중 목계별신제를 하고 있지만 별신굿을 포함하여 당고사, 뱃고사, 목계줄다리기 등을 엮어 연행(演行)하고 있는 실정이다.

목계교(牧溪橋)를 건너 목계마을로 접어들면, 왼쪽 산 바위 밑에 목계가 어떤 마을인지를 금방 알 수 있게 하는 비석군(碑石群)이 있다. 샛강에 다리를 놓아 제하공덕(濟河功德)을 칭송한 ‘밀양박공해성송덕비(密陽朴公海成頌德碑)’, 개인 재산을 털어 목계국민학교를 설립한 공을 기려 마을 사람들이 세운 ‘파평윤공해영송덕비(坡平尹公海英頌德碑)’를 비롯하여 목계마을의 유래와 목계 별신제, 줄다리기의 실제 내용을 담은 ‘목계 별신제·줄다리기 유래비’ 가 서 있다.
유래비는 화강암으로 깎은 거북 모양의 대석(臺石)과 대리석 비신(碑身), 두 마리의 용이 구름 사이에서 서로 다투는 형상의 화강암 이수(螭首)로 이루어졌다.
유래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 목계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태백준령의 일지맥(一支脈)이 부흥산(富興山)에 이르러 솔밭과 강변이 어우러져 태고시(太古時)부터 큰 마을이 형성되어 뱃길로는 경도(京都, 서울)에, 뭍으로는 강원, 충청, 경상, 경기에 이르는 큰 길목이며, 내륙항구(內陸港口)로 물화(物貨)와 사람의 내왕이 끊이지 않아 항시 큰 저자를 이루니 팔도에 살기 좋은 5촌(五村)의 하나라, 5목계(五牧溪)라 불렸고, 경도(京都)와 해외(海外)의 신문물을 유입하던 중원문화의 발상지였다. 이에 남한강의 험한 뱃길의 무사안녕과 오곡풍성을 축원하기 위하여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고 줄다리기와 별신제를 펼치니 강변 백사장에 수만 군중과 풍물패, 장사배들이 한데 어울려 천하제일의 장관을 이루었다. 줄다리기는 정월 초아흐렛날 대동제를 시발로 열나흘 날 뱃고사인 용왕제를, 이월 보름날 줄다리기로 끝이 난다. 별신제는 사월 초파일 나루터에 임시당집을 짓고 부흥당에 강신제와 영신굿 순으로 막이 내린다. 줄다리기는 뱃고사를 지낸 후, 동서양계(東西兩溪)로 나뉘어 아기줄을 시작하고, 차차 승벽(勝癖)이 커져 급기야 편장(偏將)을 세우고 이웃 동네에 청병(請兵)하여 짚을 모아 평산샘터산에서 각각 용줄을 드린다. 용머리는 칠 척에 메기수염을 달았고 용의 몸(龍身)은 백여 척에 상중석회를 붙였으니 마치 용이 살아 꿈틀거림과 같았다. 용줄이 산줄기를 타고 옮겨질 때는 꿩의 장목을 한 중앙 깃대와 풍물패를 선두로 남색기를 든 수줄꾼과 홍색기를 든 암줄꾼이 어깨에 메고 장군복을 한 편장(偏將)은 노란 띠에 공작모를 쓰고 별감, 통인, 책질, 여장복, 중복들을 호령하여 경계선에 이르러 치열한 선두 다툼 끝에 수줄이 앞서 백사장에 이르고 수삼일 후 비녀목을 지른 후 한판승부를 벌인다. 이 줄다리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그 동안 정성을 다했던 줄을 한강물에 흘려보냈으니 아! 이는 임진년 탄금대신립장군과 장병들의 수중고혼을 위로함이 아닐런지. 별신굿은 항구도시며, 육로의 요람으로 반농(半農), 반상읍(半商邑)인 목계에 수호신을 모시고 장선의 안녕과 마을의 번영을 축원하는 대동제(大同祭)의 한마당이었다. 나루의 임시 당집에서 큰 무당과 사당패를 불러 영신굿과 관등놀이, 박첨지 꼭두각시 등을 펼치니 놀이의 대축제이다. 씨름과 난장판이 함께 벌어져 수만 군중이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놀음을 하였으나나, 관에서는 이를 막지 않았다. 이제 줄다리기와 별신제가 면면이 이어오기 수백 년! 수천 단의 볏짚과 만금(萬金)을 아낌없이 봉사하고 수만 인파를 질서 있게 운용한 협동단결심을 오목계와 더불어 목계인의 자긍심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1984년 제2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줄다리기가 재현되어 문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였다. 이에 우리 조상들이 걸어온 삶의 역사의 현장을 길이 전하고자 동민들의 정성으로 목계인 김경렬이 돌을 구하여 부흥산 아래 이 비를 남기노라.
글 엮은이 우범성(禹范成), 1988년 8월 김경렬(金敬烈) 세움’
이 비를 세운 곳도 사유지였다. 1988년 동네 주민들이 서울에 거주하던 윤우식 씨의 형님을 찾아가 유래비 세울 부지를 부탁하였으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형님에게 부지를 얻지 못하자 윤우식 씨에게 연락이 왔다.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목계 유래비를 세울 부지를 부탁하기 위해서 동네 대표 5~6명이 서울로 올라온다고 연락이 왔지. 연락을 받고 여러 사람이 올라오면 동네 돈을 축을 내는 것이니 며칠 뒤 볼 일을 보러 내려갈 일이 있으니 그때 보자고 하였어. 며칠 뒤에 내려와 마을 대표들을 만나보니 비석 세울 부지를 현재의 위치가 아닌 오른쪽 가로등이 서있는 곳에 네모반듯하게 세 평을 달라고 하였어. 나는 그곳은 어렵고 현 위치보다 왼쪽에 세운다면 허락하겠다고 말하고 서울로 올라왔지. 그런데 내가 서울로 올라간 사이 현재의 위치, 바위 밑에 세워놓고 제막식을 한다고 해서 내려 와 봤지. 비 앞면에 새겨진 목계 별신제, 줄다리기 유래비를 처음 보았지. 좀 엉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고사 지내는 것은 해마다 보았지만, 별신제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죠. 줄다리기도 그냥 그렇게 쓰면 안 되죠. 귀줄다리기라고 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해 주셨다.
유래비를 바위 밑에 세운 것이 정말 잘 되었다고 생각된다. 가로등 쪽에는 덩그러니 쓸쓸하지만 지금 이곳은 병풍처럼 뒤에서 보호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