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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진천읍 상계리 이거이묘소(鎭川邑 上桂里 李居易墓所) 본문
따뜻한 봄날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 찬바람이 골짜기안에 가득하다.
상계마을 골짜기에도 바람이 제법 분다. 아무리 그래도 봄은 올것이고 또 초록의 싱그러움도 동행을 하겠지.
상계리에 위치한 이거이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상계마을 마을회관에도 청허당 관리사무소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마을 차원에서도 이거이 묘역 관리에 많은 관심이 있는 듯 합니다.
마을 초입에 사패비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상계리 마을에서 산쪽으로 뻗은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이거이 묘소(李居易 墓所)라는 입간판을 만날수 있다.
올라오는 길이 좁아서 그렇치 묘역 밑에는 제법 넒은 공터가 자리하고 있다. 주차하기에는 어려움이 없다.
이거이는 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낙천(樂天), 호는 청허당(淸虛堂) 또는 청허자(淸虛子). 평장사(平章事) 이공승(李公升)의 6세손으로 문간공 이정(李挺)의 넷째 아들이다. 이거이(李居易)는 1348년(충목왕 4) 지금의 진천군 문백면 사양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으며, 관직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조선 왕조의 건국에도 참여하여 1393년(태조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에 임명되었다. 뒤이어 평안도병마도절제사·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참찬문하부사·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이거이의 본격적인 현달은 왕자의 난이 일어나 태종이 집권한 이후부터이다. 이거이는 왕자의 난 직후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책훈되었으며, 또한 태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올랐다. 태종의 연이은 공신 책봉에는 이거이가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개국공신은 아니었지만 두 아들, 즉 장자인 이애(李薆)는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장녀 경신공주(慶愼公主)와 혼인하여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올랐으며, 넷째 아들 이백강(李伯剛)은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와 혼인하여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에 올랐다. 즉, 태조와 태종의 2대에 걸쳐 부마를 배출한 집안으로, 이러한 특수한 관계는 이거이가 그만큼 조선 왕실과 밀접한 관계였음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현달도 충분히 예견될 수 있었다. 그러나 1400년(정종 2)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의 지위에 있으면서 군제 개혁의 핵심 내용인 사병 혁파 조처에 반대하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때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402년(태종 2) 좌명공신이 되고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책봉되었다. 그 뒤에도 다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향리로 방축되어 아들 이애와 함께 진천에 은거하였으나, 또 다시 복직되어 우정승을 거쳐 영의정의 지위까지 올랐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진천 이거이 묘소관련항목 보기의 봉분은 장방형이며, 가로 400㎝, 세로 550㎝, 높이 200㎝로 분묘의 규모로는 대형에 속한다. 묘의 왼쪽에 세운 묘비는 방형 대석 위에 높이 128㎝, 너비 54㎝, 두께 19㎝의 비갈형으로 비신을 세웠으며 명문이 있다. 그리고 상석 1기, 양 한 쌍, 문인석 한 쌍, 해태석 한 쌍 등을 갖추고 있으며, 묘소 입구에는 거북대좌 위에 높이 158㎝, 너비㎝, 두께 28㎝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는 1808년(순조 8)에 다시 세운 것으로, 앞면에 전서로 ‘청허당묘비(淸虛堂墓碑)’라고 새겨져 있다. 묘소 입구의 신도비는 1976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이병관이 지었으며, 글씨는 조수형이 썼다.
진천 이거이 묘소는 1994년 6월 24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충청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진천 이거이 묘소 입구에는 신도비와 토지를 하사받은 사패비가 있다. 비석과 상석을 제외한 양, 문인석, 해태석은 도난당해 최근에 다시 세운 것이다.
묘역앞에 신도비가 있습니다.
묘소 입구의 신도비는 1976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이병관이 지었으며, 글씨는 조수형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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