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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 영하리 송광도효자문(北二面 靈下里 宋匡度孝子門)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북이면 영하리 송광도효자문(北二面 靈下里 宋匡度孝子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5. 3. 21. 18:08

북이면 영하리에 위치한 송광도 효자문입니다.

아직도 인터넷에는 맹동면 두성리에 있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충북 혁신도시가 개발이 되면서 이곳 북이면 영하리 산44-1번지로 이건 하였습니다.

 

효자문을 옮기면서 당시의 안내판까지 모두 옮겨 세워 놓았습니다.

 

송광도는 고려시대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무신이자 효자입니다.  본관은 진천(鎭川). 상산백(常山伯) 송인(宋仁)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송소(宋玿)이다.  송광도(宋匡度)는 정용낭장(精勇郎將)을 지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따르면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어찌나 지극했던지 중국 황제에게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는 본래 진천군 산정촌의 묘 아래 있었으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소실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효도와 학행으로 널리 알려져 가선대부(嘉善大夫)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고, 정려가 내려졌다.

 

덕산면 두촌리 송인묘소(德山面 斗村里 宋仁 墓所)

 

덕산면 두촌리 송인묘소(德山面 斗村里 宋仁 墓所)

고려 인종 때의 공신이며 진천송씨의 중시조인 송인(宋仁, ?〜1126)의 묘소이다. 송인은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졌다.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난 때

king6113.tistory.com

 

효자문은 진천군 이월면 산정리[지금의 진천읍 가산리]에 있었으나, 병자호란때 소실되었고 1724년(경종 4) 후손들이 음성군 맹동면 두성리에 옮겨 세웠다.그 후 두성리에 충북혁신도시가 개발이 되면서 이 곳 북이면 영하리로 이건하였습니다. 현판에는 ‘효자비순위정용랑장송광도지문(孝子備巡衛正勇郞將宋匡度之門)’이라 쓰여져 있다.

 

효자문 옆으로는 진천송씨낭장공광도의 효행추모비가 서 있습니다.

효행비 옆으로는 후손들의 추모비도 서있습니다.

 

송광도(匡度)의 큰 아들 저(儲)는 정3품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냈으며, 저(儲)의 아들 석동(石仝)은  무과에 급제한 후 세종부터 세조를 거치면서 경원(慶源) 판관, 자성군수(慈城郡守),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456년(세조 2)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등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단종(端宗)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사육신 처형 때, 아들 송창(宋昌)송녕(宋寧)송안(宋安)과 함께 죽었다. 1791년(정조 15)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에 세 아들과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