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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왕읍 유촌리조유안효자문(金旺邑 柳村里趙維顔孝子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금왕읍 유촌리조유안효자문(金旺邑 柳村里趙維顔孝子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5. 24. 10:49

 

 

 

 

 

 

 

 

 

 

 

 

 

 

 

 


  • [정의]
  •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는 조선 중기 조유안의 효자문.

  • [개설]
  • 조유안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극진하게 모셔 근동에서는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병이 나자 향을 피우고 하늘에 아버지 대신 죽기를 빌면서, 아버지의 변을 손에 받아 맛을 보면서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이 차도를 보이지 않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서 소생시켰다. 그러던 어느 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90세 되는 할머니를 모시고 산중으로 피난가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가례대로 행동하였다.

    그 뒤로도 조유안은 옛 성현의 글을 벽에 걸고 매일 반성하며 성현의 말대로 수행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효도와 학행으로 장계되어 나라에서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하고 효자 정려를 내렸는데, 효자정문은 1724년(경종 4)에 세워졌다.

  • [형태]
  •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편액에는 '효자증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한원군조유안지문숭정기원후무진지후구십칠년갑진오월일명정(孝子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管漢原君趙惟顔之門崇禎紀元後戊辰之後九十七年甲辰五月日命旌)'이라 되어 있다.


    금왕읍 유촌리에 자리한 조유안의 효자문이다

    향토문화재를 보러다니며 느끼는 점이지만 알림판등에 오타로 인하여 뜻 해석이 불분명한 곳들이 많타.

    알림판 하나하나 작은것이라도 잘 검수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조유안 효자문을 보러 유촌리에 들어서서 효자문 사진을 찍는 나를 보고 동네분들이 몇분이 오신다

    동네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알림판에 글씨에 대하여 설왕설래 하신다

    조유안 효자문의 알림판은 음성디지털문화대전의 글을 옮겨놓은 듯 하다

    성현의 글을 벽에 걸고 라는 부분이 성편의 글을 벽에 걸고 라고 오기가 되여 있으니

    동네분들 사이에도 맞네 틀리네 하는 말들이 많타

    글의 맥락으로 보아서는 성현의 글을 벽에 걸고가 맞는것 같다

    또 그 시절의 벼슬을 현시대의 무슨 벼슬과 비슷하다 하는 부연설명도 필요하다고 말씀들을 하신다

    가뜩이나 어려운 말로 써있는데 요즈음 젊은세대들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씀을 하신다

    그 또한 맞는 말씀들이다

     

    조유안-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 [가계]
  • 본관은 한양. 자는 탁이(卓爾), 호는 삼외옹(三畏翁). 아버지는 조변(趙卞)이다.

  • [활동사항]
  • 1605년(선조 38)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가평(가래들)에서 출생하였다. 황실해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품이 온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향을 피우고 아버지 대신 죽기를 하늘에 빌었으며, 대변을 맛보아 가며 아버지를 정성껏 간호하였다.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고 수혈하여 3년을 더 연명하게 하였다. 부친상이 끝나기 전, 어머니 또한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잠시도 묘소를 떠나지 않고 시묘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을 당하여 90세의 할머니를 등에 업고 깊은 산 속으로 피난하였다. 피난 가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가례(家禮)대로 행하였으며 옛 성현의 글을 벽에 걸어 놓고 매일 반성하며 수행하였다. 자식을 잃고 화병이 난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8년 동안 시묘하는 데 한결같았다.

    상을 마친 후, 후천(朽淺)가에 작은 집을 지었다. 이름은 군자가 두려워 할 세 가지인 천명(天命), 대인의 말, 성인(聖人)의 말을 가리키는 ‘삼외(三畏)’로 짓고, 그곳에서 성현의 글과 가언(嘉言), 선행을 읽으며 여생을 보내다 1672년(현종 13)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 [상훈과 추모]
  • 1723년(경종 3) 향원(鄕員) 일동이 조유안의 효도와 학행을 칭송하자 백여 명의 선비들이 합사하여 공의로 조정에 상계(上啓)하였다. 이에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한원군(漢原君)에 추봉(追封)하여 정려가 내려졌다. 정려는 1724년(경종 4) 5월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가평에 세워졌다.

    내용은 ‘효자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한원군조유안지문숭정기원무진지후구십칠년갑진오월일명립(孝子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官漢原君趙惟顔之門崇禎紀元戊辰之後九十七年甲辰五月日命立)’이다. 1725년(영조 원년) 이세근(李世槿)「정려기문」을 찬하였다.

  • [묘소]
  •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