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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3/03 (42)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연풍면 행촌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방 안용우의 시혜비이다.행촌리 연풍향교옆에 위치하고 있는 비석들은 연풍면 각지에 흩어져 있던 비석을 한군데로 모아 놓은곳이다. 이 고장을 거쳐간 군수나 현감 또는 면장등의 비석이 같이 함께 하고 있다. 비석에는 이방안용우시혜노령영세불망비(吏房安用禹施惠奴令永世不忘碑)라고 음각되여 있으며 비의 건립시기는 기해(己亥)3월이다. 비의 상태등을 보아 비석에 표기된 기해년은 1899년정도로 추정된다. 비석에 음각되여 있는 노령(奴令)이라 함은 지방관아의 관노와 사령을 칭하는 말로 이방 안용우가 관노와 사령등에게 은혜를 준것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으로 추측된다. 비석에서 칭하는 이방은 비석의 내용으로 보아 중앙관청의 이방을 칭하는 것으로 추측이 된다. 이방(吏房)은 조선시대 승정원..
청주박물관에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금동불과 철불이 보인다. 영하리 석불님이 외롭지 않아 좋겠다.
오랫만에 찾은 청주박물관이 내부공사중이다. 박물관 전체를 일종의 북카페 형식으로 꾸며 놓았다. 시민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는 박물관으로 변신중이다.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철불과 금동불이 눈에 띤다. 영하리 석불과 함께 나란히 세분이 앉아 계신다. 금동불을 렌즈에 담아 보았다.
고려 인종 때의 공신이며 진천송씨의 중시조인 송인(宋仁, ?〜1126)의 묘소이다. 송인은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상산백(常山伯)에 봉해졌다.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난 때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拓俊京)의 난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후에 찬화공신(贊化功臣)에 추증되었다. 봉분은 장방형으로 위를 3단의 화강암 장대석으로 두른 독특한 형태의 분묘이다. 지금의 묘는 1875년(고종 12)에 다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8년 봉분 확장을 위하여 다른 석재를 설치하였다가 원상 복구한 바 있다. 묘역에는 상석·동자석을 갖추었고, 봉분 오른쪽에 묘비와 묘표석이 세워져 있다. 비신의 크기 53×150×21㎝이며, 덮개돌을 얹었다. 묘비의 앞면에는 “고려인종조찬화의덕윤리공신삼중대광..
옹기는 일상생활에 유용한 쓰임새가 있는 그릇으로 붉은 갈색의 유약을 입혀 구운 질그릇을 말한다. 옹기는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만큼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예부터 옹기를 제작하는 관원이나 장인을 두어 생산토록 하였다. 기능보유자 박재환의 집안도 200여 년 전부터 옹기를 만들어 왔다. 박재환의 6대조인 박훈(朴勳, 1484∼1540)은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하여 강외면 연제리에 정착하였고, 이후 후손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박재환은 1941년 11살 때에 생활 타개책으로 아버지 박원규의 뒤를 이어 옹기공장에 취업하며 장인의 길에 들어섰으며 1958년부터 보은 송평리 옹기공장, 용인 삼계리 옹기공장, 안성 양협리 옹기공장, 인천 경서동 옹기공장 등에서 옹기 기술을 전수받았다. 1971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선대..
봄인가 보다. 맛집이라고 소문난 국수집에서 아내와 늦은 점심을 먹고 드라이브 삼아 찾아든 곳. 햇살이 따사로운 것이 이제 겨울점퍼를 벗어놓게 합니다. 오랫만에 다시 찾은 가좌리. 여기저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전원주택 부터 가좌리도 주위가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가좌리 석불좌상이 있는 곳에 바로 밑에 있던 부처샘도 비닐하우스가 들어서며 물길이 끊긴 듯 보이질 않는다. 인적 없는 서당골 동네위로 햇살만 따사롭게 내려앉는다. 서당골은 예전 이곳에 서당이 있었다고 하여 유래된 이름입니다. 석불좌상이 있는 보호각에 문을 여니 돌보는 이가 있어서인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보호각 주위도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고 2002년에 가좌리주민 이름으로 새긴 안내석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좌리 석불좌상은 비지정문화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