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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5/04 (30)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월리시를 찾았다.부처님 오신날이 이제 일주일정도 남았나?이번에는 부처님 오신날이 어린이날과 겹치는것으로 아는데.... 월리사 대웅전 앞으로 연등이 걸려있다.걸려있는 연등의 갯수가 그리 많치가 않다. 바람에 일렁이는 연등들이 쓸쓸함이 묻어 있는것 같다.내 마음이 그래서 그럴까?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 김덕숭 효자문 옆에 있는 강릉김씨 재실 백원재입니다.백원재(百源齋)라는 현판을 달고 있으며 후손들에 의하여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북이면 선암리에 위치한 초계변씨묘원입니다.나즈막한 동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연석위에 초계변씨묘원(草溪卞氏墓苑)이라고 적혀 있으며 후손들에 의하여 묘원은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이 곳에는 변경복,변충남,변경수등의 묘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초계 변씨는 시조는 고려 성종 때 문하시중을 지낸 변정실(卞庭實)로 팔계군(八溪君=草溪)에 봉해졌음으로 본관을 초계로 하였다. 중시조는 조선초 직제학을 지낸 변효문(卞孝文)이고, 입향조는 13세손 변충남(卞忠男)으로 장예원 판결사를 지내고, 1570년 경 충 남 직산에서 내수읍 비홍리로 옮겨와 정착하면서 이 일대가 세거지가 되었다. 변경복은 조선 전기 청주지역의 효자·학자입니다.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중신(仲申)이며, 호는 백음(栢陰)이다. 청원군 내수읍 비상..

임성순은 공직에 투신하여 북이면 재무게,서무계 주임등을 거쳐 부면장을 역임하고 청백한 공무원으로 면민들의 선망을 받아 1960년에 민선면장(1960.12.27~1961.06.07)으로 피선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5.16혁명으로 공직을 사퇴하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농업에 종사하면서도 지역개발에 심혈을 기울여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하여 수리안전답을 조성하고 정부지원을 받아 불당골에 소류지를 신설하였으며 동리에 전기시설을 할수 있는 시설융자등을 얻었다.1978년에는 대청호조절지 위치로 동리가 수몰될 위치로 편입되어 많은 동네 주민들이 불안해 하는 가운데 선생은 각계에 호소하여 제외되기도 하였다. 1980년에 발생한 여름장마 폭우로 인하여 마을의 도로와 마을회관이 유실되자 이듬 해 공의 노력으로 석축으로 제방공..

사람의 준비성이 얼마나 필요한가?김덕숭의 효자문을 둘러 보면서 옆에 있는 김덕숭의 아버지인 김천익의 비석을 보며 주위 어딘가에 무덤이 있을거란 생각을 했는데 막상 효자문엘 들렸다간 까맣게 잊어 버리고 말았다. 찾고자 하는 곳에 지번등을 잘 적어 놓았는데도 말이다.김덕숭 효자문도 살펴보니 다녀온지가 15년이 다 되어간다.언젠가 다시 발걸음을 하겠지만 그 때는 꼭 김천익의 묘사진을 찍어야겠다 생각을 해본다.김천익의 호는 이곡梨谷인데, 진외가인 이월면 이곡에서 성장한 데서 비롯한다. 이월면 사곡리 사지 마을에는 김천익의 묘소와 김덕숭 효자각이 있다.

세월 앞에는 홍살문도 삭고 조상을 숭모하고 기리는 마음도 옅어지는 것 같다.신경행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는 청안면 문방리에 있는 애연사이다.신경행은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백도(伯道), 호는 조은(釣隱). 신자전(辛自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세주(辛世胄)이고, 아버지는 습독(習讀) 신질(辛垤)이다.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57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에 한산군수가 되었고, 1596년에 충청도순찰사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 때 관내 홍주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나자 난의 진압에 공을 세웠다.다음 해에 군자감정(軍資監正)이 되었고, 1604년에 청난공신(淸難功臣) 삼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충청도병사가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