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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군서면 금산리 (3)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군서면(郡西面)은 1739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월서화리(越西化里), 은행정리(銀杏亭里), 사음동리(舍音洞里), 동오리(東五里), 오동리(梧桐里), 서정자리(西亭子里) 등 6개 리에 465호, 1,883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에는 월서화리, 은행정리, 사음동리, 동오리, 오동리, 서정자리, 월이동리(越伊洞里), 옥곤리(玉崑里), 각신리(覺新里) 등 9개 리에서 508호, 2,550명이 살았다. 1908년 군면 조정 때 군서일소면(郡西一所面)이라 하여 상동(上東), 중동(中東), 하동(下東), 월곡(月谷), 군전(軍田), 오동(梧桐), 서정(西亭), 옥곤(玉崑), 각신리(覺新里) 등 9개 리를 관할하다, 군서이소면(郡西二所面)에 증산(甑山), 금천(金川), 곡촌(谷村..
군서면 금산리 금천사지에 있던 금천사지부도입니다.지금은 개인 민박집 마당에 자리하고 있습니다.가까운 곳에 있는 금천사지 석조와 더불어 금천사의 존재를 알려주는 유물입니다.석조가 있는 곳에 금천사지부도의 부재가 남아 있습니다. 금천사지 터에 남아있는 당시의 석조와 부도의 받침대로 이용된 듯한 부도부재의 모습이다. 금산리(金山里)는 원래 옥천군 군서면 월서화리(越西化里)에 속해있던 마을로서 후에 동평리와 금산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른다.1739년 기록에는 군서면 월서화리라 하여 88호가 살았으며, 1891년 기록에는 100호가 살았는데, 이때는 동평리와 금산리를 관할하였다. 1908년 군,면 조정 때 군서면을 군서일소면(郡西一所面)과 군서이소면(郡西二所面)으로 나누었으며, 월서화리는 이소면에 속해 있었다.1..
가는 날은 공사가 한참이다.지금 동네가 앉아있는 곳이 예전의 금천사지 자리인 듯 하다. 먼저 옥천군과 함께 발굴팀이 집지을 자리를 발굴했다고 한다. 집지을 곳을 유물이 최대한 적게 나온쪽으로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 곳이 절터임을 입증하는 유물이 지금의 석조와 이 곳에서 50여 미터 떨어진 부도날에 있던 부도가 절터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원래의 석조는 이 곳 개울가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이 또한 원래의 자리는 아니며 절터에 인가가 들어서면서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니다이 곳 개울가에 자리하고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기였다고 한다.동네 주민들 사이에 석조의 위치를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은것 같다.절터가 있던 곳을 발굴하면서 석조를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석조를 개인이 자신의 땅으로 옮기느냐 마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