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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옥천전씨 (10)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대전 대덕구 장동 산디마을 초입에 있는 옥천전씨세거지비( 沃川全氏世居地)비입니다. 산디마을은 옥천전씨의 세거지입니다. 산디마을 초입에는 옥천전씨 가문과 관련된 효자비등이 존재합니다. 옥천전씨 유래 - 옥천전씨 종친회 (xn--od5b3r38bnwi.com) 옥천전씨 종친회옥천전씨종친회, 유래, 시조, 인터넷족보, 항렬표, 문중소식www.xn--od5b3r38bnwi.com
갈전리는 본래 보은군의 지역으로서 칡밭이 많이 있으므로 치랏골 또는 갈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증산리(甑山里)를 병합하여 갈전리라 하였다. 갈전리는 옥천전씨의 집성촌으로 보아 이 재실 역시 옥천전씨의 재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갈전소류지가 있으며 옥천군..
동이면 금암2리에서 호천과 효자문을 둘러보고 눈을 들어 길 건너를 바라보면 전식의 영당이 있는 목담영당과 더불어 양신정을 볼수있다. 목담영당앞까지 차량출입이 가능하나 농로이다 보니 큰 길가에 차를 세우고 도보로 가는것이 편하다. 큰길에서 약 50여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삼문에는 통인문이란 현판을 걸고 있으며 막돌로 담장을 둘렀으며 후손들에 의하여 잘관리되고 있다. 목담영당 옆으로는 전팽령이 밀양부사를 그만두고 1545년 고향에 왔을 때 쉬면서 글을 읽기 위해 지은 '옥천 양신정'(충청북도 기념물 29호)이 있다. 당시 건물은 정유재란(1597년) 때 불에 타버렸으며 현재의 정자는 1828년(순조28년) 다시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 목조의 기와집이다. 금암리는 군동면(郡東面) 용암..
옥천전씨 문중에서 문중의 발전과 선대들의 묘의 이장과 종중의 여러가지 일에 앞장서서 열심을 낸 김병억선생의 그간의 노력과 선행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2월에 종중의 이름으로 세운 기적비입니다. 안남면 도농리 길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석의 전면에는 옥천전공병억기적비(沃川..
양신정은 1545년(인종1)봄에 옥천인 전팽령이 밀양부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있을때 동이면 금강에 위치한 목담호숫가에 세운 정자입니다. 양신이란 뜻은 명성과 이익을 쫒지않고 물러나 조용히 자신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한다는 뜻입니다. 본인이 독서도하고 글도 가르칠 수 있도록 금강가에 있는 목담호수가에 세운 것으로, 1597년 선조30년 병화로 불타없어진 것을 1620년 광해군12년에 다시 지었으나, 1733년 영조9년에 무너져 없어졌다. 현재의 정자는 1828년 순조28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서 정면3칸, 측면2칸, 팔작목조기와집이다. 양신정은 지대가 높고 주변경관이 수려하며, 인접하여 사서공전식선생의 영정을 모신 목담영당이 위치하여 있다. 양신정이 위치한 금암리 유래는 마을 뒤에 용암사란 절이 있고 큰..
호천(虎泉)이 자리하고 있는 금암2리는 옥천전씨가 대성을 이루고 살고 있다. 금암2리는 목시(목쇠)라 부르며 적하리 부릉개 북쪽과 금암리 압촌(남쪽)사이에 중간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앞인 금강가에 있는 목담(鶩潭)호수에 따오기와 오리떼가 많아 집오리 목(鶩)자를 써서 목소리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 목소에서 목쇠로 변화히고 목쇠가 한자화하여 목금리(木金里)로 되였다가 이후 부르기 쉽게 목시가 되였다. 호천은 전엽의 효자문 길건너편에 있다.지금도 물이 나와 농업용수로 사용한다고 한다. 호천은 전엽이 시묘살이를 할때 날씨가 가물어 식수로 곤란을 겪을때 호랑이가 나타나 앞발로 땅을 긁어서 전엽은 기이하게 여겨 호랑이가 앞발로 긁은 곳을 보니 생수가 솟으므로 식수부족을 면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또한 식수부족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