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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월리사 (11)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문의면 문덕리 월리사초입에 위치하고 있는 비석군입니다. 이구당 포윤스님의 부도와 월리사 사적비 그리고 월리사금장비가 나란히 서있습니다. 전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월리사에서 깔끔하게 한자리에 정리 해놓은 듯 합니다.
월리사 입구의 왼쪽 언덕에 부도와 나란히 세워져 있었습니다. 장방형에 가까운 자연석을 가로 170㎝× 세로 100㎝로 다듬고 중앙에 홈을 마련한 비좌 위에 너비 83㎝× 높이 152㎝× 두께 24㎝의 비신을 세운 다음, 가로 110㎝× 세로 68㎝× 높이 52㎝의 팔작지붕형 개석을 덮은 조선후기 일반형 석비이다.월리사를 중건하고 나서 그 사적을 새긴 비석으로 비액에는 자경(字徑) 9.5㎝의 전서(篆書)로 ‘월리사사적비기(月裡寺事蹟碑記)’이라 쓰여 있으며, 비문은 자경 5㎝의 해서체로 문의현령 윤동형(尹東衡)이 기(記)하고 덕촌거사(德村居士) 오익기(吳益基)가 서(書)하여 1665년(현종 6) 냉절(冷節, 寒食節)에 세운 것으로 명기(銘記)되어 있다. 뒷면에는 시주 명단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부도와 금표..
월리사 대웅전은 1657년(효종 8)에 명현당(明玄堂) 원학대사(元學大師)가 이웃에 있던 신흥사(新興寺)를 옮겨 지은 것으로 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처마 끝에 장식된 암막새기와에 ‘옹정경술(雍正庚戊)’이라는 양각글씨가 있어 1730년(영조 6) 에 한차례 중수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건축양식으로 보아서도 조선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다포식이다. 자연석으로 높게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의 주초석을 사용하였는데 우주(隅柱)가 평주(平柱)보다 훨씬 굵고 높다. 앞면의 기둥 사이는 모두 정자문(井字門)을 달았으며 두공은 조밀하게 배치하고 살미 끝은 날카롭게 휘어졌다.처마는 겹처마로 앞면의 양쪽 끝에는 활주를 세워 하늘을 향해 날아갈듯이 반전한 추녀..
예전에는 절에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마을에서 절로 들어서는 입구에 월리사 표석과 함께 금기사항을 적어 놓은 금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1825년(순조 25)에 세워진 이비는 전면에 ‘이곳은 불존(佛尊)이 있는 특별한 구역이니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뒷면에는 전답을 시주한 시주자의 명단이 적혀 있다. 지금은 마을에서 절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구당부도와 사적비와 함께 나란히 서있습니다.
문의면 문덕리 월리사의 사적비와 부도 그리고 금표비가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따로 따로 있던것을 도로에서 절로 진입하는 곳에 월리사 표시비와 한자리에 세워 놓았다. 금비(禁碑)는 1825년(순조 25)에 세워진 이비는 전면에 ‘이곳은 불존(佛尊)이 있는 특별한 구역이니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 있으며, 뒷면에는 전답을 시주한 시주자의 명단이 적혀 있다. 월리사 사적비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월리(月裏)란 이름은 절이 높은 곳에 위치해 달과 가까이 있어 그리 불리어진 것이 아닌가 하며, 혹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절 아래에 월동사(月洞寺)가 있었는 데 절이 그 위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이름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믿을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 절은 옛날에 한 작은 암자였..
월리사 입구의 왼편 언덕에 서 있는 석종형(石鐘形) 부도(浮屠)로서 방형의 편마암계 자연석을 지대석(地臺石)으로 삼고 그 위에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단순한 형태이다. 합신에는 아무런 문양이 새겨지지 않았고, 상륜부(相輪部)는 연꽃 봉우리 형태로 만들었다. 일제시대 이후 수차례 도괴되어 개울가에 방치되던 것을 마을에 사는 신도들이 복원하였다고 한다 부도에 대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탐신부에 "이구당포윤(離坵堂抱允)" 의 탑으로 병오년 4월 6일에 세웠음이 음각되어 있어 조선후기에 월리사에 주재하던 포윤(抱允) 스님의 사리탑인 것을 알 수 있다. 건립시기는 연호가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규모는 전체높이 107cm, 밑지름 49cm, 중간지름 67cm, 상륜부높이 25cm이며 , 대석은 가로 113c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