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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음동마을 (9)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2010년에 찾아보고 다시 발걸음을 하니여긴가 저긴가?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찾으니 부대시설등이 많이 구비되어 있고 참 좋다.주차장에 있는 화장실 문이라도 개방하여 놓는다면 더 좋았을걸 하는 혼자만의 생각. 물론 관리의 어려움도 있겠지만 말이다. 경녕군 신도비(敬寧君神道碑)는 방구모랭이에서 안음골로 들어오다 보면 바로 길가에 있다.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난간석을 둘렀으며 그 가운데 세웠다. 기단부는 하대석에 용을 조각하였고, 두 마리의 거북이가 받친 위에 연꽃을 조각 비신(碑身)받침 위에 신도비를 세웠다. 비신은 사면의 너비가 같은 사각형으로 사면에 글씨를 조각하였다. 전면에는 ‘경녕군신도비’라고 비명을 쓰고 왼쪽면부터 비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주차장과 화장실 등 부대시설도 깔끔하..
주덕읍 사락리 음동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전주인 이진태의 묘지입니다 묘비는 후손들에 의하여 1980년에 세웠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효자통덕랑이공휘진태지묘배공인성주이씨부좌(孝子通德郞李公諱震泰之墓配恭人星州李氏祔左)라고 음기되여 있습니다. 묘지 밑으로는 이진태의 효..
주덕읍 사락리 음동마을에 있는 전주이씨의 재실입니다 모선재(慕先齋)라는 현판을 걸고 있으며 세로 지은 재실입니다.통덕랑을 지낸 전주인 이진태의 무덤아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음동마을 아을회관에서 20여미터 떨어져 좌측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통덕랑 이진태의 무덤에서 내려..
[전주이씨입향조이덕량묘소] 사진에서 왼쪽에 있는 비석이 입향조 리덕량의 묘비이다,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엄동 60-2번지에는 전주리씨 진안대군 후손들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음동마을회관(경로당)이 있는 아랫말 뒷산 서향(西向)한 넓은 골짜기에 입향조 리덕량(入鄕祖李德樑)을 비롯한 다섯 기의 묘소가 있다. 전주리씨 진안대군 후손들이 제내리 풍덕(堤內里豊德)마을에 시거하고 묘를 쓰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입향조 참의공 리덕량(入鄕祖參議公李德樑)이 용사지란(龍蛇之亂, 壬辰倭亂)의 병화(兵禍)를 당하여 괴산군 감물면 대상동에서 17세 때에 노구의 아버지를 업고 6세의 어린 동생을 앞세우고 피난 중에 여러 곳을 다니며 살 곳을 찾다가 돌림병으로 부모가 같이 돌아가셨다. 이 때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묘자리를 잡지못..
쌍분으로 호석을 두르고 장군석과 망주석을 갖추고 있다.장군석은 여러가지 형태등으로 보아 후대에 다시 세운 듯 하다. 음동 마을회관(경로당)에서 동북쪽으로 산을 올라가면 장군석이 보인다. 산 밑에는 한우를 사육하는 축사가 있다. 축사가있는 집에서 곧바로 올라가면 된다. 비석전면에는 ‘절충장군 행 산산진병마첨절제사 전주이공진항지묘(折衝將軍 行蒜山鎭兵馬僉節制使全州李公震恒之墓), 배숙인 풍산김씨 쌍부(配 淑人 豊山金氏 雙祔)’라 새기고 후면의 기록을 정리하면, 태조대왕의 제 1남인 진안대군(鎭安大君)의 휘(諱)는 방우(芳雨)요 시호(諡號)는 정의(靖懿)이다. 공의 10세손인 공(진항)은 서기 1644년(인조22) 갑신(甲申)정월 11일 제내리 공말 사저(私邸)에서 태어났으며, 부인은 양지현감(陽智縣監) 김시필(..
사락리 음동에 위치한 이상급신도비와 묘소 사이에 있는 열녀문화류씨정문은 단칸 목조와가(木造瓦家)로 정문 안에는 정려(旌閭)명칭과 정려를 받게 된 내용이 걸려 있다. 정려 명칭은 “열녀 통덕랑 이학보 처 유인문화류씨 지려(烈女通德郞李學普妻孺人 文化柳氏之閭)”로 세로로 두 글자씩 쓰여 있다. 정려를 받은 시기는 영종대왕 32년(1756년) 을사 9월로 기록되어 있다. 영종대왕은 묘호가 바뀌어 영조대왕으로 부른다. 정려를 받게 된 내용은 “비문이 지방문화재 63호로 지정받은 신도비 충강공의 5대손부로써 조부는 통정대부 여주목사(通政正夫驪州牧使)를 지내셨고 부친께서는 사마양시(司馬兩試)에 급제, 도사(都事) 벼슬을 하시어 태원종공일등(泰原從功一等)에 계시었고 그의 아드님이신 분은 문필단세(文筆壇世)하시어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