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밀양박씨
- 단지주혈
- 경주김씨
- 문경새재
- 공산성 선정비
- 티스토리챌린지
- 법주사
- 충북의 문화재
- 청주박물관
- 사과과수원
- 공주박물관
- 선돌
- 국립청주박물관
- 보성오씨
- 상당산성
- 문의문화재단지
- 부여박물관
- 한독의약박물관
- 청풍문화재단지
- 오블완
- 부도
- 곡산연씨
- 충주박물관
- 화양구곡
- 효자문
- 각연사
- 사인암
- 화양동 암각자
- 효자각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Today
- Total
목록이공린 (6)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미원면 가양리 이공린묘소(米院面 佳陽里 李公麟 墓所) (tistory.com) 미원면 가양리 이공린묘소(米院面 佳陽里 李公麟 墓所)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에 자리하고 있는 경주인 이공린의 묘입니다. 부인인 순천박씨의 묘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덤밑으로는 첬째 아들인 이오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구비(舊碑)와 king6113.tistory.com 미원면 가양리 이공린묘비(米院面 佳陽里 李公麟 墓碑) (tistory.com) 미원면 가양리 이공린묘비(米院面 佳陽里 李公麟 墓碑)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에 자리하고 있는 경주인 이공린의 묘비입니다.묘비에 전면에는 통훈대부행창평현령이공지묘(通訓大夫行昌平縣令李公之墓)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이공린의 무덤은 후 king6113.tistory.com 미원면 가양리..
후손들에 의하여 무덤앞에 1979년에 세운 이공린의 묘갈입니다.이공린과 더불어 부인인 순천박씨의 행적도 같이 각자하여 놓았습니다.이공린과 숙부인순천박씨의 묘갈은 단기4312년(1979년) 후손들에 의하여 이공린과 순천박씨의 무덤앞에 조성하였습니다.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에 자리하고 있는 경주인 이공린의 묘입니다. 부인인 순천박씨의 묘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덤밑으로는 첬째 아들인 이오의 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구비(舊碑)와 함께 1979년 후손들에 의하여 무덤앞에 새워진 묘갈과 더불어 문인석과 망주석 장명등 상석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무덤으로 올라오는 길목에 신도비를 겸한 이공린의 묘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공린은 본관은 경주(慶州). 이제현(李齊賢)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이윤인(李尹仁)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고 포부가 원대하였다. 그러나 장인 박팽년(朴彭年)의 죄에 연좌되어 몇년간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뒤 사면되어 무반의 직을 잠시 가졌다가 천거로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가 되고, 한성부참군을 겸하였다. 이어 흥덕현..
미원면 가양리에 있는 경주인 이오(李鼇)의 묘입니다 이오는 창평현감을 지낸 이공린의 장자로서 진사시에 장원하여 관직이 이조좌랑(吏曹佐郞)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단명하였다고 한다. 비석의 전면에는 이조좌랑경주이공휘오지묘(吏曹佐郞慶州李公諱鼇之墓)라고 적혀..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에 위치한 이공린의 부인 숙인순천박씨의 묘비입니다.이공린의 묘소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비에는 숙인순천박씨지묘(淑人順天朴氏之墓)라고 적혀있습니다.무덤은 근래에 후손들에 의하여 호석(護石)을 둘렀습니다.순천박씨는 사육신 박팽년의 딸입니다.이공린은 박팽년의 사위라는 이유로 많은 제약을 받았습니다.
미원면 가양리 수락동에 자리하고 있는 경주인 이공린의 묘비입니다.묘비에 전면에는 통훈대부행창평현령이공지묘(通訓大夫行昌平縣令李公之墓)라고 각자되어 있습니다. 이공린의 무덤은 후손들에 의하여 새로 개축이 되었습니다.새로 호석(護石)을 두르고 문인석과 장명등 등을 만들었습니다. 이공린은 본관은 경주(慶州). 이제현(李齊賢)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관찰사 이윤인(李尹仁)이다. 어려서부터 재질이 뛰어났고 포부가 원대하였다. 그러나 장인 박팽년(朴彭年)의 죄에 연좌되어 몇년간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그 뒤 사면되어 무반의 직을 잠시 가졌다가 천거로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가 되고, 한성부참군을 겸하였다. 이어 흥덕현감·함열현감·창평현감을 역임하면서 향리를 잘 통솔하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1504년(연산군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