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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청성면 화동리 (3)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청성면 화동리에 있는 이천서씨세거지비입니다. 화동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동리마을자랑비와 그리고 동네로의 액운등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돌탑도 2기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천서씨는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이 시조이다. 이천(利川)이란 지명은 935년(고려 태조 18)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이곳에 살던 서목(徐穆)이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준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이천서씨는 서목 때부터 고려 건국에 협력하여, 고려 건국 이후 광종∼정종 연간에 서필(徐弼), 서희(徐熙), 서눌(徐訥) 등 대대로 재상을 배출하며 명문가가 되었다. 고려 말기의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
화동리는 화성리의 동북부 계곡에 위치하며 마을 남단을 19번 국도가 통과한다. 지리적 으로 북부는 산지로 둘러싸인 배산임수형의 안정된 마을이다. 이 마을 동쪽 계곡과 남쪽 은 평야지로 벼와 사과 등을 재배한다. 동쪽은 장연리, 남쪽은 석성리 남동단, 서쪽은 석 성리와 대안리 귀곡, 북쪽은 도곡리와 접한다.화동리和洞里의 옛 지명은 되기, 두억, 대화동大和洞이었다. 되기의 ‘되’는 벼를 대는 되에 서 연유하여 벼 화禾가 되고, 기는 터 기基로 마을 의미로 마을 동洞 자가 되어 화동禾洞이라 하다가 화동和洞으로 변화된 것으로 생각한다. 자연마을은 화동과 소화동 등이 있다. 대한제국 시대부터 1929년까지 청서면의 소재지 였다. 주요 성씨는 이천서씨로, 장릉절신 사인공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단종 때 절..
청성면에 있는 화동마을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이천서씨세거지비입니다.화동리는 이천서씨들이 대성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청성면은 본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청산현 및 청산군에 속해 있던 곳으로서 청산의 남서쪽에 위치한 관계로 청산군 남면과 서면 두 개의 행정구역이었다. 1739년 여지도서에 보면 남면은 서평리를 비롯하여 4개리 463호에서 15세 이상 된 남녀가 2,029명이 살았고, 서면에는 황음리를 비롯하여 4개리 475호에서 15세 이상 된 남녀가 2,106명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4년 4월 1일 군 통폐합과 동시에 청산군이 없어지고 옥천군에 합병됨에 따라 남면을 청남면, 서면을 청서면으로 고쳐 부르고 옥천군에 속하게 하였다. 1929년 4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청남, 청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