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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초계주씨 (11)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독락정은 1998년 6월 26일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절충장군중추부사를 지낸 주몽득이 1607년(선조 40)에 세운 정자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방 1칸과 마루가 있다. 처음에는 정자로 지었지만 후에 유생들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전당으로 사용하여 서원 구실을 하였다. 1772년에 중수하고 1888년, 1923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여 보전해오다가 1965년 초계주씨독락옹파 문중에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 앞쪽에는 1668년 당시 군수였던 심후(沈候)의 ‘독락정(獨樂亭)’이란 액자가 걸려 있고, 대청에는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의 ‘율시기문(律詩記文)’이 각자되어 걸려 있다. 이 정자로 인해 마을 이름도 독락정(獨樂亭)이라고 부른다. 정자 뒤쪽에..
안남면 연주2리에 자리하고 있는 초계주씨의 사당 영모사 입니다. 영모사가 위치한 연주2리는 연주리 남부에 위치하고 있다.중간말이라 불리우는 중촌과 독락정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중촌(중촌)은 배바우와 독락정마을의 중간이라서 중간말이라고 부른다.독락정은 조선시대 절충장군 ..
안남면 연주리 비석거리에 있는 초계인 주계응의 송덕비입니다. 주게응의 송덕비는 독락정앞에 1기가 더있습니다.독락정앞에 송덕비는 문중과 관련하여 세운 공적비이며 비석거리의 송덕비는 학교의 교사신축과 교육의 발전 그리고 육영사업등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등 지대한 공로가 있어 세웠습니다.비석은 보호책으로 쇠창살을 두르고 있으며 주계응선생송덕비(周季應先生頌德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좌우로 공덕내용이 기술되여 있습니다.
주몽득(周夢得)은 조선중기의 문신이다.자는 경뢰(景賚)이며 호는 독락옹(獨樂翁)이며 본관은 초계이다.가족사항을 살펴보면 고조는 사옹원 봉사를 지낸 주세흥(周世興)이며 증조는 진사 주한,조부는 흔련원정(訓練院正)주천민이다. 아버지는 훈련원 주부 주명신이고 어머니는 공산현감을 지낸 김관(金寬)의 딸인 옥천김씨로 주몽득은 차남이다. 형은 병자호란(丙子胡亂)때 공을 세운 주몽열(周夢說)이다.부인은 경주김씨로 참봉 김인보(金仁葆)의 딸이다. 주몽득은 임진왜란때 추령에서 나무로 만든 활로 왜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고 1607년(선조40) 사답사(四答使)로 여우길(呂祐吉)과 일본에 건너가 포로1000명을 소환하였다.1624(인조2)이괄(李适)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참여했었다.후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였다. 안남면 연주리 ..
영모각은 1980년 3월 독락정 정자 우측 금강물 굽이쳐 흐르는 풍광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곳에 터전을 마련, 창건하였습니다. 초계주씨의 시조 휘 璜님을 위시한 자손 2세 시중 興寅, 3세 진사 伯, 4세 대제학 斌, 5세 찬성사 正臣, 6세 문경공 世候, 7세 文忠公 砥 군기감정 시, 8세 태자태사 鎬 소부소감 鉉, 9세 밀직사사 洛 소이 濡, 10세 열문지후 穆 검교장군 稚, 11세 안정군 濂 謙 호조판서 命昌, 12세 삼계군 士雍 정주군 彦邦 英贊 命新 공조판서 禧 군기정랑 祜, 13세 璂 외8위, 14세 휴 외4위, 15세 尙文 尙昌 長孫 泰山 衡山 돈녕부사凞 등의 선조할아버지 위패를 모셔두고 제향을 올리고 있는 곳이다.[초계주씨대종회]
안남면 연주리 초계주씨 사당인 영모사앞에 자리하고 있는 비석입니다. 초계주씨의 시조 한림학사를 지낸 주황의 위령비 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초계주씨시조한림학사휘황위령비(草溪周氏始祖翰林學士諱璜慰靈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초계주씨는 주(周)씨는 중국 주나라의 왕손으로 주나라가 망한 후에 후손들이 성을 주씨라 했다. 후손 주황(周璜)이 당나라 말에 한림학사로 있다가 907년(신라 효공왕11년) "오계의 난(五李之亂)"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초계에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초계는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의 지명이다. 초계주씨 족보에 의하면 주황의 후손에서 상주(14세손), 장흥(12세손), 삼계(12세손), 함안(12세손), 안의(13세손) 등으로 본관이 나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