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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면 갈월리 만뢰사(栢谷面 葛月里 萬賴祠)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백곡면 갈월리 만뢰사(栢谷面 葛月里 萬賴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1. 12. 22. 06:59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 강당마을에 있는 조감의 위패를 모신 사당.

 

병자호란 당시 의병장인 조감(趙瑊)만노성에서 유창국(柳昌國)과 더불어 통솔자가 없어 방황하는 수천 명의 피난민을 이끌고 만노성에 침입한 외적을 물리친 공을 세웠다. 조감은 사후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다. 만뢰사(萬賴祠)조감의 위패를 모셔 놓고 그 공적을 후손이 기리도록 하고 있다.

진천군청에서 백곡천을 따라 국도 34호선을 14㎞ 정도 직진하면 왼쪽에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 강당마을이 보인다. 왼쪽 방향의 백곡로 420번 길을 따라 강당골 방면으로 좌회전해서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마을을 기준으로 오른쪽 45도 방면 강당마을 뒷산 기슭에 만뢰사가 위치해 있다.
1851년(철종 2) 백곡면 가죽리에 죽계사(竹溪祠)를 세워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조감을 배향하였다가 고종 때의 서원철폐령으로 죽계사가 철거되면서 배향을 하지 못하였다. 해방 후인 1949년 길상사(吉祥祠)에서 다시 조감을 배향하였다가, 1961년 후손들과 지방 유림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백곡면 갈월리 강당마을에 새로 만뢰사를 건립하여 조감을 배향하게 되었다.
만뢰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만뢰사에는 ‘만뢰사(萬賴祠)’라는 편액이 달려 있으며, 반 칸의 앞퇴를 두고 있다. 정면에는 맞배지붕형 삼문을 세웠으며, 그 주위로 돌과 흙을 섞은 담장을 두르고 기와를 얹어 놓았다.
만뢰사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마을에서 관리하고 있어 주변 정리가 잘 되어 있으며,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다만 들어가는 도로가 비좁아 자가용으로 접근하기는 다소 불편하다.

 

 

조감(趙瑊)은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평양(平壤). 호는 백파(栢坡). 대제학 조정수(趙廷壽)의 후손으로 고조할아버지는 충청절도사를 지낸 조맹손(趙孟孫)이다.
 

조감(趙感)[1604~1689]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경사(經史)에 정통하였다. 19세 때 광해군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유배 보냈다가 죽인 이른바 폐모살제(廢母殺弟)의 난정(亂政)에 항거하는 상소를 올렸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진천의 만노산성(萬弩山城)으로 피신하였는데, 이때 유창국(柳昌國)과 함께 인근 7읍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피난민을 정비한 뒤 돌을 날라다 성을 수축하고 나무를 베어 성책을 꾸며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또한 활과 화살을 만들고 장정들을 요충지에 배치하여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였으며, 부녀자들까지 전비를 갖추게 하였다.

마침내 적이 공격해 오자 깃발을 높이 들고 북을 치며 독전하면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나게 하였다. 이어 유창국은 전군에 이르기를 “적은 내일 또 올 것이니,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당부하여 전비를 가다듬고 뒤이을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튿날 적이 또다시 공격해 오자 하루 종일 성 위에 올라가 전투를 독전하였다. 이에 적은 또다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가면서 7읍의 주민 수천 명이 그들의 지휘에 힘입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만노산성의 승전에 뒤이어 조감은 300명의 정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이르렀으나, 이미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하루 종일 통곡하다가 되돌아왔다. 한편 조감만노산성에서 피난하던 와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죽만 먹으면서 시묘를 한 효자로도 이름이 높았다. 1689년(숙종 15)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1851년(철종 2) 진천군 백곡면 가죽리(佳竹里)죽계사(竹溪祠)에 제향되었는데, 죽계사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어 터만 남아 있다. 1949년 김유신 장군을 모시는 길상사(吉祥祠)에 배향되었다가, 1961년 진천군 백곡면 갈월리만뢰사(萬賴祠)를 새로 지어 이향(移享)하여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