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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문백면 태락리 박필정 신도비(文白面 台洛里 朴弼正 神道碑) 본문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태락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박필정의 신도비.
박필정(朴弼正)[1684~1756]은 숙종·영조 대에 걸쳐 활동한 문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계심(季心)이며, 호는 일휴(逸休)라 하였다. 28세에 명경과에 급제한 이후 성균관 전적 병조정랑 사간원 지평 한성부좌윤 등을 거쳐 가선대부에 올랐다가 1756년(영조 32)에 나이 73세로 죽었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태락리 다랭이마을에서 청주방향으로 향하는 포장도로로 약 200m 정도 가다 보면, 논둑옆으로 국도 17호선 아래 터널을 지나는데 터널 지나 바로 좌측으로 신도비가 있다. 보호비각 안에 있다.
보호비각은 상량문에 의하면 1993년에 만들었으며 정면 1칸, 옆면 1칸의 사각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살로 막았다.
박필정 신도비는 거북대좌 위에 오석비신을 세우고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의 이수를 얹었다. 비제는 ‘가의대부 행한성부좌윤 밀양박공 휘 필정 신도비명’이며, 4면비로 비문은 송병선(宋秉璿)이 짓고, 글씨는 김경수(金敬洙)가 썼다.
비석의 건립 시기는 정확히 나타나 있지 않으며, 비석은 거북대좌 위에 오석비신을 세우고 용의 이수를 얹어놓았다. 비석은 파손된 부분이 없이 온전한 상태로 보호비각 안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은 산록의 바로 아래 위치하고 있으며, 전면으로 도로가 지나가고 있다.
박필정(朴弼正)에 대하여
1684년(숙종 11)∼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계심(季心), 호는 일휴(逸休). 참봉 박세증(朴世拯)의 아들이다.
171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718년 정언을 거쳐, 1720년 장령이 되었다.
1722년(경종 2) 사과(司果)로 있을 때,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 정권을 수립한 이후 소론 중의 과격파로서 노론 탄압의 앞장을 섰던 김일경(金一鏡)의 척소를 받았다.
1734년(영조 10) 판결사(判決事), 1751년 사직(司直), 후에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숙종·경종·영조 등 3대의 20여년 동안 요직에 있으면서 신임을 받았고 정사 논의에는 강직한 발언을 하였다.
또한 문서의 번복을 꺼림에 임금도 그의 성의를 알고 청종(聽從)하는 때가 많았다. 그리고 정의감이 강하여 토역(討逆)의 논의에도 몸소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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