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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인면 부수리 하마비(懷仁面 富壽里 下馬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회인면 부수리 하마비(懷仁面 富壽里 下馬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6. 5. 18:42

 

회인군의 중심인 중앙리와 접하고 있는 부수리에 있는 하마비이다.

중앙리에서 다리를 건너 부수리로 접어들면서 좌측산 언덕을 보면 회인향교가 보인다.

하마비는  부수1리와 부수2리가 갈라지는 삼거리 길 중앙에 자연석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부수리는 본래 회인군(懷仁郡)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교동(校洞), 종산리(종산里), 지산리(池山里)와

평창리(坪昌里), 사동(社洞), 눌곡리(訥谷里)의 각 일부를 편입하여 부수봉(富壽峰) 아래가 되므로 부수리라 하여 회북면에 편입되었다.

그 뒤(2007) 행정개편에 의하여 회북면이 회인면으로 개칭되였다. 

 

 

 

 

 

회인향교 하마비라고 예쁜명찰도 하나 얻었다

 

본래 회인향교는 조선 세종때 건립하였는데, 임진왜란시 불타자 보은향교에 합류하였다가 1611년(광해군3)에 재건하고 그 뒤 여러번 중수가 있었다.

회인향교는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 96호 지정되었다. 

모산마을 진입로변에 방형의 가까운 판석으로 만들어진 ‘하마비(下馬碑)’는 높이 92㎝, 너비 81.5㎝, 두께 11.5㎝이다.

 

회인향교 중건시 하마비도 같이 만든것으로 설명문에는 적혀있으나 글씨의 형태나 글씨의 서체등으로 보아 그 시대의 유물인지 조금은 궁금하다.

이 궁금함은 순전히 본인만의 생각임을 밝혀둔다.

 

향교에 모신 성현들에 대한 예의로 말에서 내려가라는 뜻의 하마비로 세웠다.

 

 

 

 

 

 

 

 

 

 

 

 

 

 

 

 

 

 

 

 

 

 

 

부수리의 탑사리-들[들] 은 향교골 서쪽에 있는 들이다. 옛날 절터였다고도 하고 예종때 영의정이였던 홍윤성의 집터였다고도 한다.

홍윤성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탑사리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탑사리들 

보은군 회인면 부수리 향교골에 탑사리들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이곳이 홍정승의 집터였다고 한다. 홍정승이란 조선 예종 때 영의정 홍윤성을 말한다.

홍윤성! 그는 조선 5백년을 통하여 가장 파격적으로 살다간 사람이다. 파격적으로 살았다는 것은 인간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한 도덕, 법률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는 것이고, 그가 그와 같이 살수 있었던 것은 임금이 보장해 준 것이다.

그의 파격적인 행동은 그가 권력을 잡기 이전부터 그런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과거를 보려고 서울을 오르내릴 때는 한강을 건너야 한다.

그가 한강에 이르렀을 때 수양대군이 제천정에 나와 놀고 있었다.

대군이 나와 놀고 있으므로 그의 종들이 수십 명식 배에 올라타 손님을 내쫓고 뱃길을 돌리게 하며 베통행을 금지시키고 있었다.

홍윤성이 타고 있던 배에도 이 대군의 종들이 올라와 법석을 떨었다.

이에 홍윤성은 삿대를 꺾어 그 종들을 닥치는 대로 쳐서 한강 물속에 풍덩풍덩 던져버리곤 혼자서 유유히 배를 저어 강을 건넜다.

수양대군이 정자에서 이 꼴을 보고 그 시골 선비를 불렀다. 그리고 그의 비범함을 눈여겨 두었던 것이다.

영리한 수양대군은 이 일에서 자신의 쿠데타에 이 비범한 그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를 행동대로 썼던 것이다.

김종서를 죽이던 날 저녁에 먼저 당시 훈련원 주부(지금의 군인 훈련소의 계획장교)로 있던 홍윤성은 공사를 보고 한다는 구실로

김종서의 집에 먼저 가서 동정을 살폈다. 김종서는 당시 힘이 세다고 소문난 그를 불러들여 자기의 활 가운데 튼튼한 활을 골라 당겨보라 하였다. 홍윤성은 그 강긍을 당겨 거듭 두 개를 모두 꺾어 버리니 김종서가 크게 칭찬하고 그의 첩에게 큰 그릇에 술을 부어주게 하니

세 사발을 마시고 돌아갔다.

세조 임금이 신하들에게 술 먹기 시합을 시킬 때 으뜸한 것도 그였다. 세조 임금은 그에게 고래같이 마신다 하여 경음당(鯨飮堂)이란 호를 지어주고 그 별호를 새긴 인장을 주었는데 홍윤성은 이 호를 평생토록 즐겨 썼다고 한다. 그는 치부하는 데도 파격적이었다. 다른 고관들이 숨어서 몰래 치부한 데 비하여 그는 공개적으로 뇌물을 받았다. 그의 집앞에는 뇌물을 가져오는 심부름꾼과 말, 수레, 가마꾼을 위해 문밖에다 솥을 건 집을 수십 채나 지어 두었다. 그의 호화주택에 세조는 경해(傾海-바닷물이 기울어 든다는 뜻)라는 익살스러운 집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그는 “경해 속의 경음당”이라고 무척 자랑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파격적으로 살다 간 그의 삶은 어느 면에서 매력이 있다.

그는 1425년에 당시 회인현이었던 회북이면 부수리에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하고 조실부모하여 숙부에게서 자랐다. 1450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1453년에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를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정난공신 2등이 되었고 1455년에 세조가 임금이 되자 좌익공신 3등에 인산군에 봉해졌다. 1467년에 우의정이 되었고 이듬해 세조임금이 죽자 신숙주, 한명회 등과 원상(다음 임금이 즉위 할 때까지 국사를 처리하는 정승)이 되었다. 1469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1470년에 부원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성종 임금 즉위에 세운 공으로 좌리공신 1등이 되었다. 그의 처음 이름은 우성이었고 자는 수옹이었다. 위평이라 시호되었다.

부수리 탑사리들은 홍정승이 태어나서 자란 옛집이 있었던 터라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