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가덕면 한계리 목사이익저영세불망비(加德面 閑溪里 牧使李益著永世不忘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가덕면 한계리 목사이익저영세불망비(加德面 閑溪里 牧使李益著永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2. 7. 1. 17:10

 

보은을 다녀오는데 날씨가 저문다.그냥 집으로 갈까 하다가 가덕면 한계리에 있는 석불과 마주한 비가 생각이 났다.누구의 비일까 참 많이 궁금했는데 마모가 심한 석질의 비석이라 자세한 이름을 알수가 없다.이리저리 알아보고 꿰어 맞추어 보니 대략 그 시절의 청주목사를 지낸사람은 이익저(李益著)로 가장 접근할수 있었다

 

 

 

가덕면 한게리 석조비로불과 마을어귀나무아래로 자리를 옮긴 청주목사이익저의 영세불망비이다.앞에 보이는 논을 경지정리 할때 발견한 비석이라고 한다.정축(丁丑)년 11월에 세운비라고 각자되여 있다

 

 

 

 

 

 

 

자연암석을 다듬어 각자하여 놓았다.석질의 마모가 심한 재질이라 자세한 글씨를 탁본을 해보기전에는 구분할수가 없을것 같다.목사 이공익o영세불망비라고 각자되여있다.비의 세운날자는 정축년 11월에 건립된것으로 확인 되였다.비가 청주목사 이익저의 영세불망비 라는 가정하에 정축년을 계산을 하니 약 1697(조선 숙종 23년)년이 가장 근접하다.

 

 

 

 

 

 

 

 

 

이익저는 한국인물정보를 통해 검색을 해보니 생졸년 미상. 조선 후기 문신‧청백리.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조암(釣巖) 이시백(李時白)의 종손이다.관직은 청주목사(淸州牧使)와 상주목사(尙州牧使) 등을 지냈다. 청렴과 인덕으로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전라도 태인현감(泰仁縣監)으로 재직했을 때는 백성들이 그의 덕을 기려 관덕정(觀德亭)을 세우는 등 재직하던 지역의 백성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 또 1708년(숙종 34)에는 암행어사의 감찰에서 포계(褒啓)를 받았다.《청구야담(靑邱野談)》에 조현명(趙顯命) 과의 일화가 전한다.아들은 이성(李渻)이고, 손자는 이명덕(李命德)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익저에 대하여 알수있는 년도가 1708년에 암행어사의 감찰에서 포계를 받았다는 기록을 보면 정축년은 1697년이 가장 근접하다. 청주목사를 지내고 보통의 영세불망비는 떠난지 1-2년안에 세우는것이 통례인바 이익저의 청주목사 재임기간을 알아보는 것이 이익저의 영세불망비라는 확신에 한발자국 더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이익저에 대하여 조금 더 알아보고 혹여나 다음 답사객을 위하여 동네분들에게 내용을 알려드려야겠다.

 

 

 

 

 

 

 

 

 

 

 

 

 

 

 

목사(牧使)-고려시대인 983년(성종 2) 지방제도의 정비과정에서 광주(廣州)·충주·청주·양주·공주·승주·전주·나주·진주·상주·황주·해주 등 12목에 지방관으로 파견한 것이 처음이다. 1018년(현종 9) 이후 12목 가운데 공주·승주·양주·해주를 폐지하고 8목제를 실시했는데, 실제로는 거의 목사를 파견하지 않았고 부사(副使)만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정3품 외관직인 목사를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 등지에 있던 20목에 파견했다. 이들이 하던 일은 관할 지역의 농업장려, 호구(戶口)의 확보, 공부(貢賦)의 징수, 교육진흥, 군정의 수비, 사송(詞訟)의 처결(處決) 등이었고, 진관체제(鎭管體制)가 실시되면서 진관의 책임자인 첨절제사(僉節制使)의 군직을 겸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