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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곡면 오향리 남상철송덕비(甘谷面 梧杏里 南相喆頌德碑) 본문
감곡면 오향리에 소재한 감곡면 사무소 출입구화단에 있다.
감곡면장을 지낸 남상철의 송덕비이다.
남상철은 일제강점기 시절 지역유지로 활동하였다.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후 감곡면 매괴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도 하였다
1921년부터 감곡면장을 비롯하여 충청북도 도의회의원으로 20여년간 재직 하였다.
해방후 한국독립당에도 관여 하였으며 영친왕을 일본에서 귀국시키고자 하는 취지의 영친왕환국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남상철(1891~1978). 성인 남종삼(南鍾三)의 손자. 평신도. 세례명 프란치스코. 경기도 안성군 미양면 갈전리에서 유복자로 태어나 생후 1개월 만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외가(外家)에서 자랐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통신강의로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한 후, 충북 장호원(현재의 감곡)본당에서 운영하던 매괴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했고, 1921년부터 충북 음성군 감곡면 면장 겸 도(道)의회 의원으로 20여년 동안 재직했으며 광복 후 1947년에는 영친왕(英親王) 환국추진위원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영친왕의 귀국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교회사와 교회사적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주어사강학(走魚寺講學)을 연구하여 그 결과를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 주어사의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경향잡지> 1962년 11월호에서 1963년 1월호까지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5명의 순교 선조를 가진 순교자의 후손답게 항상 봉사하는 자세로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고 자손들에게는 사심 없는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따르라고 가르쳤다. 1978년 7월 13일 노환으로 서울 삼양동 자택에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의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3남 5녀가 있는데 이들 중 3명은 현재 수녀로 있다. 주요저술로는 위에 언급한 <한국 천주교의 요람지 주어사의 발견>(경향잡지, 1962년 11월호~1963년 1월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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