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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면 안락리 유몽정신도비(老隱面 安樂里 柳夢鼎神道碑) 본문
안락리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유몽정의 신도비이다.
유몽정은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경임(景任), 호는 학암(鶴巖). 유관(柳寬)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유용량(柳用良)이고,
어머니는 안동인 권련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현감이 되었다. 1574년(선조7)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있을 때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7년(선조 20) 성주목사로 재직 중 풍속의 문란을 방지하지 못하고, 죄수가 옥문을 부수고 도망한 책임을 지고 또다시 파직되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성절사로 명나라에 들어가 조선의 위급한 사항을 보고하고 구원병을 청하여 원병을 끌어오는 데 공을 세우고 같은 해 9월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병조참의, 승정원승지,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이듬해 승정원우승지,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그 해 9월 병으로 사망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안락리 산89번지에 있으며, 묘역은 50평 정도이다. 대리석 상석 측면 둘레에 묘명을 각자하였으나 마멸이 심하다.
마멸이 심하여 후손들의 의하여 새로 조성하였다.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조씩 있다. 묘소의 동남쪽 마을 입구에 김유(金揉)가 지은 비갈(碑碣)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공신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유몽정의 이름도 거론되었으나 조정의 의논이 달라 책봉되지 못하였다. 광해군 때에 아들 유영이 상소하여 공신으로 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예전의 논의를 번복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좌찬성에 증직되어 그 명예만 갖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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