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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면 가신리 충경사(老隱面 佳新理 忠景祠) 본문
충경사가 있는 가신리는 가정(佳亭)과 신흥동(新興洞)의 첫 자를 따서 가신동(街新洞)이라 하였다.가정천(佳亭川)과 신흥천(新興川)을 따라 농사짓기에 편리한 산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조선 중기 이전에 주민들이 들어와서 생활의 터전을 잡았을 것으로 여겨진다.가신2리에 장수황씨, 가신1리에 풍산홍씨·계계유씨 그리고 신흥동에 청주한씨가 누대에 걸쳐 세거하였다.가정마을 앞에는 넓은 공수들이 펼쳐져 예전에는 여기서 세곡(稅穀)을 거두기도 하였다.
충경사는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 가신리에 있는 조선 중기 사당이다.조선 왕조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공신들의 충절을 높이 사 이들의 관직을 추증하면서 시호를 내리고 사당을 짓도록 하였다.더욱이 가문 의식의 형성으로 존조경종(尊祖敬宗)이 강화되어 사당을 건립하여 조상을 제사하려는 노력도 늘어나 사당이 수없이 세워지기도 하였다.충경사는 본래 1708년(숙종 34) 유백증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면서 사당 건립이 시도되었으나 이루어지지 못한 바 있었다.이후 기계유씨 종중에서 뜻을 모아 1967년 노은면 가신리에 사당 준공을 이루었고 여기에 충경공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유백증은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이다.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자선(子先), 호는 취헌(翠軒).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역임한 유홍(兪泓)이며, 아버지는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한 유대일(兪大逸)이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인 풍산군(豊山君) 이종린(李宗麟)의 딸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다.
유백증은 1612년(광해군4) 진사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615년에 승문원부정자가 되고, 1621년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반대하여 사직하고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지평이 되고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으로 기평군(杞平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조정랑, 사인, 응교를 거쳐 사간이 되었으며 당시 김신국(金藎國), 조성(趙誠) 등을 탄핵하였다. 1625년(인조3) 부응교로 있을 때 남이공(南以恭)이 김류(金瑬)의 힘을 믿고 불법을 자행한다고 논박하다가 이천현감(利川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이 파천한 강화로 찾아가 사도시정(司導寺正)이 되어 화의(和議)의 잘못을 상소했다. 1629년 나만갑(羅萬甲)의 당인(黨人)이라는 이유로 가평군수(加平郡守)로 좌천되었고 이어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으나 대신들의 안일함을 비난하다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밀려났으니 곧바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이후 병조참지,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1636년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그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화의를 주장한 윤방(尹昉), 김류(金瑬) 등의 처형을 상소하여 파직되었다.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대사성으로 기용되고 이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어 다시 윤방, 김류의 반성 없는 실정과 김경징(金慶懲), 이민구(李敏求)의 강화도 실패의 죄를 탄핵했다. 1638년 대사헌이 되어 다시 윤방이 종묘의 신주(神主)를 모독한 죄를 탄핵하고 국가자강책(國家自强策)에 대하여 10조(條)를 들어 상소했다. 이후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저서로는 3권 3책의 『취헌소차(翠軒疏箚)』가 있다.
[유백증의 영정]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기와지붕을 하고 있으며, 사당에는 ‘충경사(忠景祠)’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기계유씨 문중에서 조상인 충경공 유백증을 위해 내려진 부조묘인 충경사를 250여년 만에 건립한 것으로 우리의 문중 의식과 조상 숭배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역사 현장이라 하겠다.
차량의 진입은 불편하며 도로 한쪽으로 주차를 하고 걸으면 도로에서 3-4분 거리에 위치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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