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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덕련리 삼연정(周德邑 德蓮里 三蓮亭)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주덕읍 덕련리 삼연정(周德邑 德蓮里 三蓮亭)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10. 8. 17:15

 

덕련리는 성주이씨가 대성으로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장내리·조동·창동을 병합하고 북쪽의 가장 높은 산인 덕련산(德蓮山)[438m, 일명 자주봉산]의 이름을 따서 덕련리라 하였다.

 

충주군 덕면(德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장내리·조동·창동을 병합하여 덕련산의 이름을 따서 덕련리라 하고 주덕면에 편입하였다. 1995년 주덕면이 주덕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주덕읍 덕련리가 되었다.



 

 

 

 

삼연정은 1859년(철종 10) 연은 이교면(李敎勉)이 서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던 자리에 1924년 제자 정재호 등 30여 명이 스승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정재호의 호를 따라 삼연정(三蓮亭)이라 이름 지은 정자가 있다. 바로 옆에는 이교면의 생가가 있으며, 이교면의 아버지 첫돌인 1737년 2월 5일에 심었다는 키 23m가량의 충주시 보호수 제4호로 지정된 상수리나무도 바로 곁에 있다. 삼연정이 세워진 후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모정 참나무라고 불렀다 한다.

 

 

 

덕련리(德蓮里) 360번지 조동마을에 위치하는 정자로서 조선 철종 10년(1895)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이 서당(書堂)을 건립하고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그가 설립했던 서당 장소에 1924년 제자 정재호(鄭在彪) 등 30여명이 스승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고자 창건한 후, 삼(三)자는 鄕里에 유명한 德蓮山이 있고, 향리(鄕里) 역(亦) 덕련리요, 선생의 아호(雅號)가 연은(蓮隱) 인지라 그의 호(號)를 따라 삼연정(三蓮亭)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그러나 1944년 불의(不意)의 홍수(洪水)로 기지(基地)가 유락(流落)되어 도복(倒伏) 직전(直前)에 있었으나 중수(重修)에 대한 아무런 재정적(財政的) 뒷받침이 없어 문하생들이 회합을 갖고 결의한 결과 성금을 그때 당시 쌀 70가마의 성금을 갹출(醵出)하여 1970년 4월 1일 도랑 건너 현재의 위치에 중수(重修)한 것이라 한다.건물의 규모는 2단의 기단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워 지은 팔각정 목조 건물로서 공포(栱包)7)는 이익공8)계통(二翼供系統)의 양식을 다르고 있으나, 퇴화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창방(昌枋)9)으로 결구된 기둥사이에는 화각반(花刻盤) 1구씩을 배치하여 주심도리(主心道里)10) 장혀11)를 받쳐주고 있다.내부는 우물 천정으로 단청을 한 겹처마 지붕으로 지재(止齋) 박준구(朴準龜)가 지은 삼연정중수기(三蓮亭重修記), 동문계서(同問契序), 동문생성명(同問生姓名)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현재 부착된 삼연정중수기(三蓮亭重修記)는 김종훈 글, 동문계서(同問契序)는 김종훈의 선친이며 연은선생의 애제자였던 김영배 글, 동문생성명(同問生姓名)은 연은선생의 친필(親筆)이라한다.

 

 

 

 

 

 

 

삼연정과 관련있는 인물로 이교면선생이 있습니다. 연은(蓮隱) 이교면(李敎勉. 일명, 병하 柄夏)(1859.9.10~1944.5.13) 己未九月十日(1859년 9월 10일) 성주이씨(星州李) 통정 이헌규의 아들로 태어났다. 병하(柄夏)의 휘(諱)는 교면(敎勉)이고, 字는 여직(汝直)이요, 호(號)는 연은(蓮隱)이다.어려서부터 총명하여 6세에 입학수학(入學修學) 학문이 뛰어나고 천성이 仁孝하여 鄕里는 물론 인근동리(隣近洞里)에서 굴지(屈指)의 대 유사(大儒士)가 된 것이다.학교라고는 간혹 한문서당이 전부이던 시절이라 종족(宗族)은 물론이고 향리인근동
(鄕里隣近洞) 원거리(遠距離) 주민 및 자녀들이 거의 다 문맹자(文盲者)가 될 것을 염려하여 내 집 사랑방을 한문(漢文)서당(書堂)으로 제공하고 향리(鄕里)아동(兒童)을 가르침에 원근(遠近)을 물론(勿論)하고 향학열(向學熱)에 불타는 학도(學徒)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강론(講論)을 들었으며, 극빈(極貧) 학생들에게는사재(私財)를 털어 지필묵(紙筆墨)과 서책(書冊)을 무료로 제공, 불철주야(不撤晝夜) 전력(專力)을 다하여 가르치니 문하생(門下生)들이 후(後)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한 지사(志士)들이 많이 속출(續出)하였다.1910년 국치(國恥) 후 일제강점(日帝强占) 때는배일사상(排日思想)이 강(强)하여 정미년(丁未年) 의병(義兵) 거사(擧事)시(時)는 음양(陰陽)으로 의병(義兵)을 도와 민족자결(民族自決)의식을 고취(鼓吹)하였다.
어느 날 의병 수명(數名)이 선생(先生)을 찾아와서 부족(不足)되는 군량미(軍糧米)를 요구하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수고한다는 치사(致辭)와 함께 돈과 쌀, 그리고 애마(愛馬)까지주어 보냈다한다. 즉시 왜경(倭警)이 정보를 입수(入手) 득달같 달려와 소리치자 선생은 자진(自進)하여 아주 당당하게 내 민족(民族)을 내가 구원(救援)하기로서니 무슨 잘못이 있느냐? 하며 대항하자 왜경(倭警)이 총검(銃劍)을 가슴에 대고 위협(威脅)하였다.그러나 선생은 태연자약(泰然自若) 나는 이미 사생(死生)을 결단(決斷)한 자(者)인즉 의리(義理)와 도덕(道德)을 아는 자(者)이면 너희들 양심(良心)에 맡기겠다 고하며 의지(意志)를 굴(屈)하지 않으니 그들도 가히 대인(大人)됨을 알고 스스로 물러갔다한다.그의 문하생(門下生)들도 선생(先生)의 배일(排日) 정신을 본받았는데 안동기(安東基)는 조선(朝鮮)총독(總督)을 살해(殺害)하려고 모의(謀議)하다가 사전에 발각(發覺)되어 일본(日本)관헌(官憲)에 붙들려 투옥(投獄) 5년 후에 출감(出監)되었다한다.또한 일제(日帝)의 단발령(斷髮令)에 강력히 반대하여 자손과 문하생들의 귀감(龜鑑)이 되었다고 한다.때마침 일제(日帝)가각처(各處)에 사립(私立)강습소(講習所)를 설치(設置)하여 학생(學生)을 모집(募集)하자 선생은 현금(現今) 일제는 저희들의 말을 가르치고 순화(淳化)하려하 광분(狂奔)하고 있으니 이에 속지말고 이 서당(書堂)에서공부(工夫)하기를 역설(力說)하여 한 사람도 강습소(講習所)에 가 자(者)가 없었다한다.하루는 왜인(倭人)서장(署長)과 조선인3순사(巡査)가 찾아와서 서당(書堂) 철거(撤去)를 종용(慫慂)하 선생은 강습소(講習所)는 왜인(倭人)들의 글을 가르치는데요,여기는우리글은 가르치는곳이다 라고 대갈일성(大喝一聲)하下)에 이들을 추방(追放)하였다. 또한 선생은 덕성(德性)이 온후(溫厚)하고 언소(言笑)가적으며 아무리혹서(酷暑)철이라도 대립과 옷을 벗지 않았으며 지절(志節)이 출중(出衆)하고 처신(處身)이 근엄(謹嚴)하였다.이렇게 강직한 선생이었으나 부모님께서 노환(老患)으로 와병(臥病)중에는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고 시병(侍病)하였으나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라 돌아가심에 3년상을 치루는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칭송 않는 이가 없으며 타인(他人)의 귀감(龜鑑)이 되었다.이로써 훈육(訓育)과 효성(孝誠)박애(博愛)로 일생을 바치시고 저서(著書) 수(數)권(卷)이 있으며 1944년 5월 13일 조국의 광복을 1년여 앞두시고 향년 88세로 졸(卒)하였고ㅠ묘소(墓所)는 부흥산(富興山) 도덕골에 있다.

 

 

 

 

 

삼연정은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덕련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정자이다.

삼연정의 유래를 살펴보면, 삼(三)은 향리에 덕련산(德蓮山)이 있고 향리 역시 덕련리(德蓮里)이며 이교면의 호가 연은(蓮隱)인지라 호를 차용하여 삼연정(三蓮亭)이 된 것이다. 주덕읍 덕련리 조동마을 안쪽 약 100여 평의 터에 동문수학한 이교면의 문하생들이 동문계를 조직하여 서당 터에 세운 팔각정으로, 1944년,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를 하였으나 관리가 부실하여 쇠락한 상태라 보수가 시급하다.

주덕읍 덕련리의 지방도 525호선 주변 창동마을에서 조동길을 따라 2㎞ 정도 가면 조동마을을 만난다. 주차장이 있는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따라 약 300m 정도 올라가면 개울 건너에 삼연정이 있다

1924년 건립하였으나 1944년 홍수로 피해를 입어 무너지기 직전이었을 때 중수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문하생들이 회합을 갖고 결의한 결과, 쌀 70가마의 성금을 추렴하여 1970년 도랑 건너 현 위치에 중수하였다.

2단의 시멘트 기단 위에 원형주를 세운 팔각정으로, 기둥 내부에 화려한 낙양을 부착하였다. 공포(栱包)는 이익공 계통을 따르고 있으나 퇴화한 수법을 보이며, 창방으로 결구된 주칸에는 화각반 1구씩을 배치하여 주심도리 장혀를 받쳤다. 내부는 우물천장으로 하여 단청을 입힌 겹처마 팔모지붕이다.
 
내부에는 35×189.5㎝ 크기의 현판이 세 개 부착되어 있는데, 한 개의 현판은 완전히 지워진 상태이며, 하나는 동문계서(同文契序)로, 1917년 10월 2일 동양(東陽) 신직균(申直均)이 제(題)한 것이다.

또 하나는 30명의 동문생 명단을 적은 현판으로, 1931년 9월 4일에 썼으며, 연은 이교성의 친필이라 전해진다.

현재 삼연정은 많이 쇠락하여 보수가 시급한 상황이다.

 

 

 

근간에 세운 성주이씨 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