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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금면 봉황리 김극형신도비(可金面 鳳凰里 金克亨 神道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가금면 봉황리 김극형신도비(可金面 鳳凰里 金克亨 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10. 10. 09:52

김극형 신도비는 가금면 봉황리 봉황사가 위치한 능암마을을 바라보며 좌측 산자락에 위치하고있다.

현재는 접근하기도 편하며 주위는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듯 정리되여 있었다.

 

 

김극형은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태숙(泰叔), 호는 사천(沙川)·운촌(雲村). 아버지는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인백(金仁伯)이다.

 

박지계(朴知誡)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30년(인조 8) 식년시 생원과에 급제하였다. 스승 박지계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상소하여 구명했고, 1635년(인조 13) 박지계가 별세하자 1년 동안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마음으로 옷차림과 행동을 조심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란을 피해 호서(충청도의 별칭으로 제천 의림지의 서쪽)의 산골로 들어갔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창릉참봉(조선 제8대
예종의 능과 안순왕후 한씨의 능을 관리하는 벼슬)과 동몽교관(조선 전기에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하여 각 군현에 둔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고향인 광주(廣州) 백운산 아래에 살면서 학동들을 가르쳤다.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 익위사부솔(翊衛司副率), 위솔(衛率), 공조좌랑을 거쳐 화순현감으로 부임하여 흉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진휼하는데 힘썼다.

 

김극형은 학문에 정진하고 배움을 실천하는데 있어 어긋남이 없었다. 송시열(宋時烈)과 서한으로써 성선체용설(性善體用說)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만년에 자신의 주장이 잘못됨을 깨닫고 고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봉황리 능골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김극형의 신도비이다.

 

김극형은 생전에는 창릉참봉(昌陵參奉), 동몽교관(童蒙敎官), 익위사부솔(翊衛司副率), 위솔(衛率), 공조정랑(工曹正郞), 화순현감(和順縣監) 등을 역임하였고, 학식이 높아 송시열과 성선체용설(性善體用說)을 변론하기 위해 편지로 의견을 수없이 교환하였다. 만년에 자기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수정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705년(숙종 31) 12월에 좌의정 박세채(朴世采)가 찬하고, 영의정 평천군(平川君) 신완(申玩)이 전(篆)하여 1차 건립하였고, 1710년(숙종 36) 3월에 김재로(金在魯)가 근술(謹述)하여 고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시 세운 시기를 1710년으로 추정하는 근거는 청풍김씨 후인 김재로가 1759년에 사망하였기에 그 이전에 고쳐 쓴 것으로 추정된다.

 

가금면 봉황리 능골마을의 입구 남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은 후손들에 의해 잘관리되고 있다.

 

비좌개석의 형태로 대석은 91×150×91㎝이며, 비신은 227×94×36㎝이다. 지붕돌은 50×155×92㎝로 규모가 크다.

 

제액은 ‘증좌찬성사천선생김공신도비명(贈左贊成沙川先生金公神道碑銘)’이라 하였고 본문은 2.5×2.5㎝ 크기의 해서체로 음기하였는데, 1차 건립 때의 찬자(撰者)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박세채(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世子府朴世采)’이다. 또한 전자(篆者)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평천군신완(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平川君申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