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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남면 마송리 석장승1호(遠南面 馬松里 石長丞1號)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원남면 마송리 석장승1호(遠南面 馬松里 石長丞1號)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3. 10. 9. 06:53

 

1호 장승(미륵형 장승)은 원래 음성으로 넘어가는 길목, 곧 마송교 바로 건너쪽 방앗간 뒤에 있던 것을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미륵형 장승을 세운 이유는 미륵세계가 전개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은 것으로 생각된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 오미에는 3기의 석장승이 전해 온다. 2002년 3월 15일 충청북도민속자료 제12호로 지정된 마송리 석장승들은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에 세워진 것들이다. 청주고씨 집성촌이기도 한 오미 사람들에 따르면, 1712년 이 마을 출신 고중명(高重明)[1681~1765]이 무과에 합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는 고중명이 무과에 합격한 해로부터 정확히 280년 전 윗대 조상인 고덕수(高德秀)가 1432년(세종 14) 식년시(式年試)에 진사(進士) 4위로 합격하고, 그후 15년 뒤인 1447년(세종 29)에
고덕칭(高德稱)이 식년시 정과(丁科)에 15위로 합격한 후 처음 맞는 경사였기에 이를 경축하고 기념하며, 자손 대대로 귀감으로 삼게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덕수는 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 청주고씨 입향조이다.

 

본관은 청주. 자는 군명(君明), 호는 퇴암(退庵). 할아버지는 중랑장 고천련(高天連), 아버지는 고유렴(高有廉)이다. 부인은 순천박씨박장생의 손녀이다. 동생으로 고덕칭(高德稱), 고덕부(高德符)가 있다.

 

1419년(세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2년(세종 14)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439년(세종 21) 강음현감(江陰縣監)에 제수되고, 1450년(세종 32) 사헌부헌납, 1452년(문종 2)에 연풍현감을 지냈다. 임기를 마치고 음성 마피골로 돌아와 방운정(訪雲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다.

1456년(세조 2) 병자사화가 일어나자
박팽년과 재종매부(再從妹夫)란 관계로 여주에 보내졌고, 아우 고덕칭·고덕부도 함께 유배되었다. 1472년(성종 3) 5월 24일 한양 주변 이외의 곳에서는 골라 살 수 있게 되어 처가가 있는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 옛 집으로 돌아왔다. 단종이 죽자 음식을 끊고 자결하였다.


 

 

장승은 마을 입구나 동제구역(洞祭區域)에 세운 마을 장승과 사찰 입구에 세운 사찰 장승, 그리고 지역 간의 경계로 삼거나 성문이나 병영(兵營)·해창(海倉)·관로(官路) 등에 세운 공공 장승으로 구분할 수 있다. 경계표나 이정표로 삼기 위해 세우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역질을 막고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 수호의 성격이 강하다. 이 때문에 오랜 옛날부터 마을의 흉액을 밖으로 몰아내기 위하여 동제로서 장승제를 행하였으며, 때로는 개인의 소원성취를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렇듯 장승은 엄연한 신앙의 대상이었기에 신성시하며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1호 장승(미륵형 장승)은 높이가 240㎝인데, 그중 약 80㎝가 얼굴이다. 앞면 너비는 40㎝ 정도이다. 얼굴은 장방형으로, 머리에는 관음보살과 같은 관을 쓴 듯하며, 이마에는 백호가 표시되어 있다. 눈썹은 거의 한일(一) 자이며, 눈은 눈망울이 매우 크며 앞으로 불룩 튀어나왔다.

오른쪽 귀는 약간 위쪽으로 붙어 있는 반면 왼쪽 귀는 아래로 처져 있다. 인중이 매우 넓으며, 입은 약간 반달형으로 다물고 있다. 턱밑을 깊숙이 들여 파내어 윤곽이 뚜렷하다. 손은 분명하지는 않으나 마치 앞으로 두 팔을 모아 팔짱을 끼고 있는 것 같다. 몸통 부분에 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마모가 심하여 정확하지는 않다. 다른 장승과 마찬가지로 ‘靜界大將軍(정계대장군)’이라는 명문을 새겨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배 중앙 부분과 다리 부분에 깊게 파인 구멍이 나 있는데, 6·25전쟁 때 미군의 총에 맞은 자국이라고 전한다.

 

 

마송리 석장승들의 본래 위치로 볼 때, 고중명의 과거 합격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석장승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여기에는 석장승으로써 마을의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마을에 안정과 번창을 가져다 주는 일종의 수호신으로서의 기능까지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볼 때, 석장승과 같은 상징물이 마을을 보호해 주고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갖게 되면 사람들은 매사에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결국 마송리 석장승은 각종 재앙으로부터 심리적 안정감과 위안을 주는 수호신이요, 동민들을 화합 단결하게 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고 볼 수 있다.[디지털음성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