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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면 죽전리 오위장홍재관시혜비(賢都面 竹田里 五衛將洪在寬施惠碑) 본문
청원군 현도면죽암리에 있는 오위장홍재관시혜비이다.
죽암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비의 건립시기는 무신년(戊申年,1908년)이라고 비의 뒷면에 음각되여 있다
비의 전면에는 오위장홍재관시혜비(五衛將洪在寬施惠碑)라고 음각되여 있다.
비의 시헤내용은 어려움에 처한 면과 리민들을 위하여 쌀을 풀고 채무를 탕감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고 기록되여 있다.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으뜸 벼슬로 종이품(從二品)이었다가 정조(正祖) 때 정삼품(正三品)으로 격하되었으며, 정원은 12원에서 15원으로 늘렸다. 3원을 증원하되 2인을 문관으로 충당하여 위장소의 사무를 맡아보게 하였는데 이를 조사오위장(曹司五衛將)이라고 하였다. 아래로 상호군(上護軍: 正三品), 대호군(大護軍: 從三品), 호군(護軍: 正四品), 부호군(副護軍: 從四品), 사직(司直: 正五品), 부사직(副司直: 從五品), 사과(司果: 正六品), 부장(部將: 從六品), 부사과(副司果: 從六品), 사정(司正: 正七品), 부사정(副司正: 從七品), 사맹(司猛: 正八品), 부사맹(副司猛: 從八品), 사용(司勇: 正九品), 부사용(副司勇: 從九品)이 있었다.
직소(職所)를 오위장청(五衛將廳) 또는 위장청(衛將廳)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실권을 훈련도감(訓鍊都監) 등의 새 군영(軍營)에 빼앗기고, 도성(都城)의 숙위(宿衛)만을 맡아보면서 명목만 남아 있다가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오위가 평상시에는 주로 입직(入直)과 행순(行巡: 도성 내외를 순찰하는 일) 및 시위(侍衛)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오위장들은 외소(外所)·남소(南所)·서소(西所)·동소(東所)·북소(北所) 등 다섯 위장소(衛將所)에 번을 갈아 각각 1명씩 입직하여 왕의 지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순행에 있어서는 오위장이 군사 10명을 인솔하고 시간을 나누어 순찰한 뒤 이상 유무를 직접 왕에게 보고하였다. 나라에 경사가 있어 국왕에게 축하를 드리는 조하(朝賀)가 있을 때에는 위장이 그 군사를 이끌고 궁정에 정렬, 시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위장 [五衛將] (관직명사전, 2011.1.7,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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