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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면 금정리 관어대(深川面 錦汀里 觀魚臺) 본문
영동군 향토유적 제 3 호 심천면 약목리와 금정리 도로변에 기암(奇岩)이 우뚝 솟아 양강(陽江)에 불쑥 튀어나오니, 강물은 대(臺)를 휘어 감고 맴돌며, 대(臺)는 깍아 세운듯 벼랑을 이루고 송림이 우거져 있어 고기가 노니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절경이다. 옛날 민욱(閔昱)이 그 아우 민성(閔晟)과 더불어 이곳에서 놀며, 아래 위로 고기가 노는 모양을 장난하며 보았기에 이름을 관어대라 하였다. 민욱은 조선중기의 학자로 호는 석계(石溪)이며 영동출신이다. "관어대"란 현판은 민병석(閔丙奭)의 친필로서 민병석은 호가 시남(詩南)으로 조선말기의 문신이며, 시화에 능하고 행서(行書)에 뛰어 났다. 둥근기둥 목조기와 팔작집으로 정면 2칸, 9.9㎡이다.
관어대(觀魚臺)라는 현판을 쓴 민병석은 1880년(고종 17) 문과에 급제한 뒤 1883년 승지, 1884년 참의군국사무(參議軍國事務)에 등용되었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소(景召), 호는 시남(詩南)·의재(毅齋). 영위(泳緯)의 손자로, 경식(敬植)의 아들이다.
1884년의 갑신정변 이후 도승지로서 민응식(閔應植)과 상의, 장은규(張殷奎)를 일본에 밀파해 망명 중인 김옥균(金玉均)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1886년부터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한성부좌윤·예조참판·육영공원변리(育英公院辨理)·강화유수 등을 지냈다.
1889년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어 1894년까지 평양에 머물렀다. 이 때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해 조병세(趙秉世)의 탄핵을 받았다.
1894년 청일전쟁 중 대원군의 밀서를 받아 청장(淸將)과 내통, 일본세력을 축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1895년 초 원주에 유배되었다. 1895년 민씨척족세력의 부활과 함께 사면된 뒤, 군부대신·학부대신·궁내부대신·철도원총재(鐵道院摠裁) 등의 요직을 지냈다.
관직 외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직조단포주식회사(織造緞布株式會社)·농업회사 등의 조직과 경영에 참여하였다. 1905년과 1909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시찰하였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일제로부터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과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민족항일기에는 조선인 대지주의 한 사람으로 행세하였다. 서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을 때 특히 행서에 능하였다. 작품으로는 광화문에 있는 고종황제보령육순어극사십년칭경기념비(高宗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紀念碑)와 평안남도 중화군에 있는 고구려동명왕릉비(高句麗東明王陵碑)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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