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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천면 약목리 백천조씨재실(深川面 藥沐里 白川趙氏齋室)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영동군(永同郡)

심천면 약목리 백천조씨재실(深川面 藥沐里 白川趙氏齋室)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2. 23. 07:31

 

심천면 약목리에서 금정리로 너머가는 세절고개 못미쳐 자리하고있다.

많이 쇠락하여 있고 백천조씨의 재실인 듯 하다. 대문옆에는 백천조씨영동파선영지지(白川趙氏永同派先瑩之地)라고 음각되여있는 비석이 1기있다.

 

 

이 마을의 이름에는 세 부처와 어느 중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부터 약 600여 년 전 지금의 '날근터'라 불려 오는 약물탕 부근 산에서 한 사내 아이가 낮잠을 자고 있다. 그 아이는 깊고 깊은잠 속에 빠졌고 잠 속에서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갑자기 그 아이 앞에 나타난 백발의 중은 지팡이를 들어 허공의 어느 곳을 가리쳤다.그 아이가 말하기를
"어디를 가리키시나이까, 노스님."하고 묻자 노승은,
"너는 어서 잠을 깨어라."
하고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아이는 다시 묻기를,
"꿈을 깨어 어찌 하랍시는 분부이옵니까?"하고 우러러보자 백발노승이,
"너는 아무아무 산밑 바위로 달려가 보라."하였다.
"바위 위에 가면 무엇이 있나이까, 노스님?"하고 그 아이는 되물었다. 노승은,
"그 곳에 가면 애기 부처 세 쌍이 있을 터이니 너는 그 애기 부처를 바위 틈에서 나오는 약물로 목욕을 시켜 곳 바위 위에 모셔두거 라 " 했다.
그 아이는 비록 꿈 속이었으나 애기 부처가있다는 바람에 그 부처와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서 벌떡 일어나 보았다. 깨어 보니물론 꿈이었다. 꿈이라도 아주 아름다운 꿈이었고, 마치 잠을 깬 생시의 일처럼 노승이 하던 말이 귀에 쟁쟁했다.
그 아이는 꿈에 백발노승이 일러준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과연 노승의 말대로 산밑 바위 위에는 애기 부처 세 쌍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 아이는 너무 기쁜 나머지 꿈 속의노승이 일러준 대로 그 옆의 약물이 나오는바위 틈을 찾아 갔다. 바위 틈에서는 차고 깨끗한 약물이 쉴새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아이는 약물에 목욕을 시켜 애기 부처를 바위위에 앉혀 보았다. 그 아이로서는 그와 같은애기 부처도 처음 보는 일이었고, 노승의 말대로 목욕을 시켜 바위 위에 모셨으니 해가진 뒤의 일이 걱정이었다.
애기 부처를 그 곳에 두고 집으로 가면 밤이슬을 맞을 것이고, 밤 사이에 비가 오면 온통 비를 맞게 될 것이니 그 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그 아이는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았다. 백발노승이 바위 위에 모시라는 말은 곧 절을 지어 눈 비를 막으라는 이야기였음을 그 아기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 아이는 마을사람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절을 지어 애기부처를 절 안에 모셨다.
그로부터 마을은 매년 번성하였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가 늘어 가기만 하였다.그때까지 마을 이름이 없던 그 마을은 애기부처를 약물로 목욕시켜 절에 모신 내력을 들어 '약목골'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약목골은 해마다 번성하여 백백하게 사는 사람들이 늘어만 갔다
농사를 지으면 으레 풍년이 들었고, 집집마다 곡식이 남아 돌았다 마을 사람들은 가난한 이웃 사람을 상대로 '장리(長利)쌀'을 놓았다. 장리란 봄에 곡식을 꾸어주고 가을에 받아들일 때 꾸어준 쌀의 50%를 이자로 받으니까 매년 상당한 이익이 돌아왔다.그 이유로 약물탕 옆 바위를 '장이바위'라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의 번영은 영원히 계속되지 않았다. 약목골 사람들이 모두 잘 살게 되니까 가난하게 사는 이웃 마을 사람들이 시샘을 하기 시작했다.
이웃 마을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약목골의번성은 어디까지나 애기 부처님 덕이라는 것이었다 애기 부처만 약목골에 있지 많다면그 사람들이 그렇게 부귀를 누리고 살 수 있겠느냐는 것이 었다
마침내 이웃 마온 사람들은 약목골에서 애기 부처를 빼앗아 오자는 의견을 모았다. 며칠 뒤 애석하게도 약목골 사람들은 애기 부처 세 쌍을 아주 도난 당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부터 마을은 매년 흉년이 거듭되고 불행한 일이 잦아졌다. 급기야 애기 부처를 모셨던 절도 허물어지더니 마을에는 질병과 소년의 죽음이 그칠 사이도 없이 일어났다. 청년들을 풀어 애기 부처를 찾아 나서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세월이 지날수록 마을은 점점 못 살게되어 결국 지금의 동네로 옮겨 앉고 말았는데 이마을이 오늘날의 약목리(藥沐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