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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혜원면 월성리 광흥사석조여래좌상(廣惠院面 月城里 廣興寺 石造如來坐像)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진천군(鎭川郡)

광혜원면 월성리 광흥사석조여래좌상(廣惠院面 月城里 廣興寺 石造如來坐像)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9. 26. 14:05

 

진천군 광혜원면을 둘러보기로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준비없이 둘러본다는 것은 마음을 조급하게 하나보다.

몇군데 수첩에 적어 놓았던 곳을 둘러 보기로 하니 벌써 마음이 앞선다.

 

도토리가 길가에 가득하다.

월성리 광흥사를 찾는 길에는 임자없는 도토리가 길위로 가득하다.

 

 

 

광흥사가 위치하는 월성리는 담안 북쪽에 고무래처럼 생긴 고무래봉이 있다.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하장리, 강당리, 월굴리, 광의리, 검성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월굴과 검성의 이름을 따서 월성리라 한다. 자연마을로는 월성, 월곡 등이 있다. 월성은 담안이라고도 한다. 마을 남쪽에 반달같은 산이 둘러싸여 성(成)을 이루고 있다. 마을이 성 안에 위치했다 하여, 담 안에 있다는 뜻으로 담안이라 한다. 월곡은 들 복판에 위치한 마을로 검성(儉城)골이라고도 한다. 음성군 대소면 대풍리와 경계를 이루며 달처럼 생겼다 하여 월곡이라 칭한다고 한다.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 월성리  광흥사에 있는 고려 전기의 석조 불상이다.

월성리 마을 못미쳐 오른쪽으로 광흥사 팻말이 보이며 너주막한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대웅전이 아닌 바깥에 따로 보호각을 만들어 모시고 있는데 광흥사에 계시는 보살님이 많이 힘이 드신가 보다

보호각에는 향불이 꺼지고 찾는이 없으니 부처님이 많이 외로워 보인다. 물론 나 혼자만의 생각임을 밝혀둔다. 

 

 

진천군 광혜원면 월성리 산 2번지 광흥사 경내에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이다.


광혜원리 절터와 관련한 문헌 기록이 전하지 않아 사찰의 이름이나 내력도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도로 확장 공사 때 광혜원리 절터에 있던 석조 불상 1구를 광혜원농협 앞에 보호각을 마련하고 안치하였다가, 관리가 어렵게 되자 1984년 인근의 광흥사로 옮겼다.

불상은 파손이 심하나 대좌와 광배에 고식의 양식이 보여서 고려시대 절터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일대를 관전지로 보는 속설이 있어, 절터인지 혹은 다른 용도의 건물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광흥사 석조여래좌상은 화강암 재질로, 파손과 마멸이 심하여 본래 모습을 추측하기가 매우 어렵다. 높이 97㎝의 남아 있는 불상의 모습을 가늠하여 본래의 모습을 추출해 보면 파손되기 전에는 대좌와 광배를 갖춘 완전한 불상이었으나, 지금은 대좌의 일부분인 상대석과 불신, 광배의 일부분만 남아 있다.

불상은 발견 당시부터 목 위의 불두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후에 다시 만들어 복원하였다

 

 

 

 

반쯤 남아 있는 광배에는 두 줄의 양각선과 화염문(火炎文)이 보인다.

결가부좌한 다리는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두 손은 합장을 하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되어 있으며, 두꺼운 옷 주름이 양 어깨부터 무릎 아래까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상대석은 8각으로 되어 있고, 연화문은 16개의 홑꽃잎으로 앙련(仰蓮)[연꽃이 위로 향한 것처럼 그린 모양]하였다. 광배는 불신과 하나의 석조로 되어 있으며, 절반가량이 파손된 상태이고, 당초 보주(寶珠)[위가 뾰족하고 좌우 양쪽과 위에 불꽃 모양의 장식을 단 구슬]형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광흥사 석조여래좌상은 현재 소실된 불두를 새로 석조하여 접합하였기 때문에 몸체와 불두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불상의 옷 주름과 대좌, 광배의 양식이 옛 격식을 갖추고 있다.

 

 

광흥사 석조여래좌상은 전체적인 형태나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나말여초(羅襪麗初)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특히 팔각의 부등변(不等邊) 대좌는 당시의 시대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