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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읍 농소리 마천목신도비(梧倉邑 農所里 馬天牧神道碑)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오창읍 농소리 마천목신도비(梧倉邑 農所里 馬天牧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12. 27. 12:16

 

장흥마씨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시조 마완()은 은()나라 양성인()으로 학식과 덕행이 높은 군자()였다. 은() 말기에 마완() · 마장() 부자는 주왕()의 폭정()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경서()를 가지고 은거()하였다. 은()이 멸망한 후에 마장이 기자()와 더불어 조선에 처음으로 동래()하셨다고 한다. 마씨는 동래조() 마장()으로부터 비롯하였으나, 옛 법도()에 따라 마장의 부 마완()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기원전 18년에 마려() · 오간() · 전섭() 등 10인이 온조()를 따라 졸본부여()를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와 위례성에 도읍하여 십제()를 건국하고 온조()를 왕()으로 받들었다. 온조왕이 개국원훈() 마려()에게 좌보() 벼슬을 내리고, 마사량현()을 식읍()으로 주어서 후손이 세거()하였다.

장흥마씨 [長興馬氏] (성씨와 본관, 2011.1.14, 한국학중앙연구원)

 

 

[마천목의 영정]

 

 

 

마천목 [馬天牧]은 본관 장흥(). 자 군련(). 호 오천(). 시호 충정(). 힘과 무예가 출중하여 고려 우왕 때 산원()으로 등용되어 대장군에 이르고, 1398년(태조 7)에는 상장군이 되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방원()을 받들어 1401년(태종 1) 좌명공신() 3등에 동지총제()가 되었다. 1410년 영변부사(), 1412년(태종 12) 전라도 병마도절제사(使) ·나주목판사(使)를 거쳐 1414년 장흥군()에 봉해지고, 1416년 도총제를 거쳐 군부판사()가 되었다.

병조판서 때 상소한 성보론()에서 조선 초기에 처음으로 북방 6진()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1421년(세종 3) 명나라에 가서 조선의 승인에 공을 세워 태상왕()이 낙천정에서 치하연()을 베풀었다. 1429년 부원군에 봉해졌다. 1431년에 그가 죽자 세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특별히 예관()에게 명하여 치제()하게 하였다. 영의정이 추증되고, 화산서원() ·충현사()에 배향되었다.

 

 

마천목의 영정을 모신 충정영당은 돌보는이 없는 듯 스러지고 있다

마천목의 신도비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은 주위에 어딘가 마천목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 인데...

주위를 둘러 보아도 모두 개발되는지 무덤의 흔적은 찾을수가 없는것 같다.

인터넷등이서 확인 한바에는 마천목의 묘소는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 방주마을에 있다고 하는데 신도비가 이 곳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월의 흐름따라 돌보는 이 없으니 영당은 무너지고 피폐하며 세월의 흔적을 모두 거두고 있는것 같다.

조립식 담장도 무너지고 먼지만 쌓인 영당은 이제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그 농도가 옅어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