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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읍 농소리 충정영당(梧倉邑 農所里 忠靖影堂)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오창읍 농소리 충정영당(梧倉邑 農所里 忠靖影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12. 28. 09:42

 

오창읍 농소리를 찾는 시간이 오후 4시경 정도일까?

아직은 해가 남았는데도 조바심에 마음은 바쁘다. 주변으로는 많은 개발이 되여가고 이제는 동네 한켠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볐을 사당에는

이제는 돌보는 이없이 이곳 저곳이 무너지고 파손된채로 찾는이 없이 겨울바람만 스산하다.

 

 

사당 옆으로는 건축폐기물등이 쌓여 있고 조립식 담장도 무너지고 사당의 군데군데도 사람의 손길이 필요해 보인다.

아무리 옛것이 천대 받는 시대가 되였다고 해도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름하여 충정영당이라고 한다. 1942년에 마천목(, 1358~1431)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영당이다. 영정은 좌명공신상()의 모사본을 1935년 전라남도 곡성의 장흥영당()에서 다시 모사한 것이다. 관복을 입은 전신교의좌상()으로 가로 80㎝, 세로 120㎝의 설채견본()이다. 영정은 확인하지 못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영당은 1942년에 세우고 1982년에 보수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 마루방에 중앙에 쌍문을, 좌우에 협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마당 앞에는 일각 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마천목은 1358(공민왕 7)∼1431(세종 13).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1381년(우왕 7) 산원(散員)에 처음 제수된 뒤 여러 차례 승진하여 태조 초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에는 정안군(靖安君)을 도와 공훈을 세웠고, 1399년(정종 1) 상장군(上將軍)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자 다시 정안군의 선봉이 되어 크게 공헌하였다.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녹훈되면서 전(田) 80결(結), 노비 8구, 은품대(銀品帶) 1요(腰), 표리(表裏) 1감, 말 1필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회령군(會寧君)에 책봉되어 동지총제(同知摠制)로 승진하였다. 그에게 내려진 공신 녹권과 교서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408년 11월에는 회령군 겸 중군총제(會寧君兼中軍摠制)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9월 감순청(監巡廳) 재직 중에 전리(典吏) 고을귀(高乙貴)를 치사(致死)한 사건으로 사헌부의 청죄(請罪)를 받았으나, 태종의 배려로 곡성(谷城) 유배에 그쳤다. 그해 10월에 십일도도절제사(十一道都節制使)를 설치함에 따라 전라도도절제사에 복직되었다.
1411년 1월 각위절제사(各衛節制使)를 설치하면서 용기시위사절제사(龍騎侍衛司節制使)가 되었고, 이듬해 5월 전라도병마도절제사판나주목사(全羅道兵馬都節制使判羅州牧使)로 파견되었다. 1414년에 장흥군(長興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16년에는 도총제(都摠制)에 개수되었다가 곧 전라도병마도절제사로 파견되고, 1418년 2월에 내시위절제사(內侍衛節制使)가 되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좌우패(左右牌)를 좌우금위(左右禁衛)로 개편하면서 우금위절제사가 되고, 그 달에 장흥군에 제수되었다. 1423년 9월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를 지냈다.
1424년 3월 편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인 곡성현으로 내려갔으며, 곧 어머니 상을 치렀다. 1428년 7월 장흥군에 복직되었다. 이듬해에 연로를 이유로 치사를 청했으나 도리어 장흥부원군(長興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고, 부원군으로서 죽었다. 성품이 광심(廣深 : 너그러우면서 마음이 깊음)하고 순근(醇謹 : 온순하면서 근신함)하며, 무략이 있어 시위와 국방에 공헌이 있었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은 마동욱의 고향이야기에서 옮겨왔습니다]

 

 

충정영당에 있는 영정은 확인하지 못했으며 위의 사진은 장흥을 지키는 마동욱의 고향이야기에서 옮겨왔습니다

지금의 영당은 1942년에 세우고 1982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 홑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중앙에 쌍문과 좌우에 협문을 달고 앞마루를 놓았다.


마당 앞에 일각문을 세우고 주변에는 담장을 둘렀다. 그리고 마당에는 194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돌보는 이 없는 장흥마씨 사당은 흐르는 세월속에 몸을 뉘이고 있다.

처마끝과 들보등이 많이 낡아 낙후되여 빠른 보수의 손길을 요하고 있다

외로운 사당마당 한켠에는 마천목의 신도비만이 쓸쓸히 한켠을 장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