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미원면 수산리 홍석기묘갈(米院面 壽山里 洪錫箕墓碣)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수산리 홍석기묘갈(米院面 壽山里 洪錫箕墓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12. 29. 21:00

 

미원면 수산리에 위치한 남양홍문의 남양홍씨충효문이 있다.충효문옆에 보면 커다란 비석이 서있는데 효자 홍석기의 묘갈이다.홍석기의 묘갈은 남양홍문의 시조를 모신 남양사에서 증평쪽으로 20여미터 더 진행하면  오른쪽으로 수산식품 들어가는 길가에 위치하고 있다.비석의 일부분이 떨어진것을 다시 맞추어 놓은것이 이채롭다.

 

홍석기[洪錫箕](1606-1680)는 본관은 남양(). 자는 원구(), 호는 만주(). 경상남도 고성 출신이다.청주 판교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수산리)를 근거지로 한 남양홍씨 집안의 인물이다.아버지는 홍이정(洪頤正), 할아버지는 홍순각(洪純慤), 증조할아버지는 홍해(洪瀣), 외할아버지는 남충원(南忠元), 장인은 김발이다.아들로 홍일우(洪一宇) 등 4형제를 두었고, 동생으로 홍석주(洪錫周)가 있다.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해 장릉참봉()이 되었다. 1641년 호조좌랑으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했고,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다.그러나 1645년 만언소()를 올려 시사()를 논하다가 해운판관()으로 좌천되었다. 1654년(효종 5) 예조정랑으로 다시 기용되었고, 문신정시()에 급제해 인동부사(使)로 임명되었다.

1656년 성천부사(使)·양재찰방() 등을 거쳐, 1659년 단양군수로 부임하였다. 그 곳에서 문교()에 힘을 기울여 사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1665년(현종 6) 해주목사와 1667년 서천군수, 1669년 영광군수를 역임했으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그 뒤 남원목사로 임명되어 임기를 마친 뒤 청주에 자리잡고 후운정()을 지어 그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후운정은 최치원()이 세상의 명리()를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산 높은 뜻을 잇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다. 그는 이 곳에 머무르면서 화양()에 와 있는 송시열()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시사를 담론하기도 하였다.그는 늙어서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세상사에 관해 시로써 표현하였다. 그러한 시가 수백 편에 이르렀다. 병중에서도 나라를 걱정해 수천 언에 이르는 상소문을 지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만주집』과 『존주록()』이 있다. 시호는 효정()이다.

 

 

 

청주에 있는 망선루(望仙樓)의 중건상량문을 쓰기도 한 그는 항상 나라를 걱정하였고, 세상사가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늘 시를 써서 울적한 심정을 표현하여 그의 시가 수백편이 된다고 한다. 병중에서도 나라를 걱정하여 많은 상소문을 지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효로 효정(孝定)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청주읍지에 「수락당(壽樂堂)」 시가 수록되어 있다.

 

천지간에 세 칸 집 강산(江山)에 술취한 한 노인 있네.

스스로 마땅히 세월을 잊어버렸는데

하필 서동(西東)을 묻는고?

새는 맑은 호수안으로 내려앉고

구름은 푸르름 가운데 생겨나네.

손님이 와서 붓을 적시는 것으로 인연되니

시구(詩句)가 공려하지 못하여 부끄럽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수산리 산5번지에 묘소가 있는데 상석, 향로석, 망주석 등이 있다.권상하(權尙夏)가 찬하고 홍순곤이 쓴 그의 묘비가 있는데 당대에 세우지 못하고 1928년에 세운 것이다.묘비는 묘소에서 약 1.5㎞ 가량 떨어진 남양홍문 충효각 옆에 세워져 있는데 신도비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안타깝게도 방문하는 날은 묘소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음을 기약하여야 할것 같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권상하가 지은 홍석기의 묘갈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근대에 문장을 잘하는 선비로 반드시 만주() 홍공(, 홍석기)을 일컫는데, 내가 만주를 보건대 문장은 여사()에 불과할 뿐이다. 아! 갑신년(, 1644년 인조 22년) 이후 중국에 오랑캐가 점거하여 천하에 더는 명()나라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는데, 공만이 홀로 분발해 붓을 잡고 글을 지어 중국에 격문()을 보내려고 했으니, 그 강개()하고 격절()한 기개가 곧장 유계(, 유주()와 계주()를 말함) 연운(, 명대() 경도() 일대) 사이에 치달았다. 비록 하늘이 허여하지 않아서 끝내 공언()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나 후세로 하여금 우리 동방에 그런 논의와 정신이 있었음을 알도록 할 것은 이 글이 아니면 되지 않으니, 어찌 그리 열렬()한가? 화양 선생(, 송시열()을 가리킴)이 그 의지()를 고상하게 여겨서 귀한 보배로까지 기대해 중국에 천일()이 다시 밝아지는 날에 과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공이 지닌 마음을 족히 알 수 있다고 하겠다.

공의 휘()는 석기()요, 자()는 원구()이며, 만주()는 그의 호()이다. 만력() 병오년(, 1606년 선조 39년) 12월 20일에 출생했는데, 어려서부터 자질이 특이하고 영리함이 절륜()하였다. 4세 때 글을 지어 보는 자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조금 자라서 낙주()
구봉서()에게 배웠는데, 하는 말이 문득 사람을 놀라게 해서 재주 있다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정묘년(, 1627년 인조 5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장릉 참봉()에 보임되었다. 신사년(, 1641년 인조 19년)에 호조 좌랑()에 보임되었는데, 이해에 정시() 제1인()으로 뽑혀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이어서 간원()으로 들어가서 정언()이 된 것이 무릇 7, 8차례였으며 항상 삼자함(, 지제교())을 띠었다. 을유년(, 1645년 인조 23년)에 만언소()로 당로자()의 뜻을 거슬러 해운 판관()으로 나갔다. 한 유명한 관원()이 속읍()에 수령으로 있었는데, 공이 법으로 다스리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자 이로 인해서 비방하는 말이 떼를 지어 일어나 파직되어 낙척()한 것이 거의 10년이었다.

갑오년(, 1654년 효종 5년)에 예조 정랑()에 임명되고 또 문신 정시()에 발탁되어 즉시 인동 부사(使)를 제수했는데, 대간()이 너무 빠른 승진이라 논핵해서 면직하였다. 병신년(, 1656년 효종 7년)에 성천 부사(使)를 제수했다가 즉시 체직해서 양재 찰방()이 되었다. 무술년(, 1658년 효종 9년)에 형조 정랑을 제수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해년(, 1659년 효종 10년)에 단양 군수()가 되었는데, 군()이 벽지()이고 백성들이 어리석었으므로 공이 문교()를 힘껏 행하자 선비들의 기풍이 크게 변했는데 백성들이 추사비()를 세웠다.

신축년(, 1661년 현종 2년)에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결성 현감()이 되었는데, 가을에 상()을 당하였다. 복()을 벗고 예빈시 정()을 제수하였다. 을사년(, 1665년 현종 6년)에 해주 목사(使)를 제수했는데, 공은 평소 본도 방백() 서필원()과 틈이 있었다. 그때 마침 강도()를 붙잡아 죽인 일이 있자 서필원이 계문하여 공이 통정 대부()로 승품()되었으나 이는 겉으로는 포상하여 드러낸 것처럼 한 것이나 실은 해치려고 한 것이어서, 공이 그런 뜻을 헤아려 알고는 병을 핑계해 돌아오고 말았다.

정미년(, 1667년 현종 8년)에 서천 군수()가 되었는데, 현종()께서 온천()에 거둥할 때 차원()의 노고로 특별히 제주 목사(使)를 제수하자 연신()이 그 우천()함을 혐의하여 보내지 말기를 계청()하였다. 기유년(, 1669년 현종 10년)에 영광 군수()가 되었으나 감사()
김징()의 수연() 일에 연루되어 핵파()되었다가 해를 넘겨 다시 성천 부사(使)를 제수하였는데, 공은 이미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아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남원 부사(使)를 제수해 억지로 부임해서 질만(滿)하여 해직하고 상당(, 청주)의 판교()로 돌아왔다.

이윽고 검단산()으로 들어가 고운() 최치원()이 예전에 놀던 곳을 얻어 작은 정자를 짓고 ‘후운정()’이라 편액()을 걸었으니, 후세()의 고운()이라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각건() 도복() 차림으로 날마다 그 안에서 노닐며 유연()히 늙어 가는 줄을 모르고 세간의 명리() 득실()과 영욕()에 일체 담박()하였다. 후운정은 화양() 문하()에서 1사(, 30리)의 가까운 거리였다. 공은 한가한 날이면 견여(輿)를 타고 자주 왕래하며 머물러 학문을 토론하고 고금의 일을 이야기하였다. 또 시대를 한탄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민망하게 여기는 말이 자주 글이나 주석()에서 나와 개연함이 주부자()가 누() 아래에서 영탄()하는 뜻이 있자, 화양 선생이 더욱 공의 마음씀에 감격하여 세한지교()로 허여하였다. 무릇 감개()하여 불평()하는 즈음이면 문득 음영()에 나타나 전후 수창()한 것이 거의 수십 백 편이나 된다. 얼마 후 시사()가 크게 변하여 공은 평상시 근심하면서 더욱 세상에 나갈 뜻이 없었다. 허적()이 공과 친분이 있어서 글을 보내 좋은 벼슬로 꾀었으나 공은 준엄한 말로 물리치고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보였으므로,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겼으나 끝내 두려워하지 않았다.

공은 병환 중에도 시사()에 분개하여 수천 마디의 상소문을 초()하여 시배()들의 죄상()을 드러내어 장차 올리려고 하였다. 친구들이 번갈아 찾아와 말리자 공이 탄식하기를, “고인()이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상소문의 초고를 불태운 것이 어찌 까닭이 없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병이 더욱 심해져 중지하고 말았다. 임종()에 자제를 시켜 가묘()에 고하기를, “불효()한 자식이요 불충()한 신하여서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고하기를 마치고 갑자기 서거하니, 이때가 경신년(, 1680년 숙종 6년) 2월 26일이었다. 고복()하기 며칠 전 형조 참의()를 제수하는 명이 이르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이해 7월 모일()에 주() 동쪽 주곡() 해좌()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부인() 김씨()와 합부()하였다.

공은 미목()이 시원하고 기도()가 맑고 깨끗했으며 성품이 효성스러웠다. 6세 때에 모부인()이 별세하였으므로 공은 항상 일찍 어머니 여읜 것을 애통해 하여 양친()이 있는 자를 보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생원공(, 홍이중())을 지성으로 어김없이 섬기면서 지체()를 함께 받들었다. 결성()에 있을 때 하루는 마음이 불안해지기에 급히 달려 귀성()했더니 생원공이 병환이 난 지 며칠이 되는데, 병시중을 들어 효를 다하자 향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서모()를 지성으로 모시고 내외()의 가난한 친척을 두루 후하게 돌보아 주었다. 낙주()가 죽고 후사()가 없자 공이 힘을 다해 주선해서 예로써 장제()를 치루어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동일하게 하는 의리를 다하였다.

젊어서부터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시사()와 백가()의 책을 한번 보면 문득 외었기 때문에 문사()가 민첩해서 짓는 재주가 물이 솟아오르듯 산이 빼어나듯 했으므로, 동시()의 동명()
정두경(),송곡() 조복양()공 같은 분도 조금 양보해야 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요()를 섬기지 않았다. 갑인년(, 1674년 현종 15년) 이후에는 영원히 벼슬할 생각을 버리어 문을 닫고 오는 사람을 물리치며 풍화()와 설월()의 계절이 바뀔 때는 시를 지어 울적하고 실망한 생각을 풀었는데, 음조(調)가 맑고 가사의 뜻이 비창()하여 장차 추색()과 고상함을 다투려는 듯해서 사림()들이 전해가며 외었다. 공이 지은 시 약간 수()가 기아()에 선입()되어 있으며 ≪만주집()≫ 수십 권과 ≪존주록()≫ 1책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공은 남양인()으로, 고려 때 태사() 홍은열()의 후손이다. 높은 벼슬이 이어져 수백 년 동안 끊어지지 않았는데, 홍계성()과 홍해()에 이르러서는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으니, 이분들이 공의 고조와 증조이다. 할아버지 홍순각()은 문과()에 급제한 동지()로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생원공()은 홍이중()이다. 어머니 고성 남씨()는 현감 남충원()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의 대성()으로 증() 승지() 김발(金발)의 딸인데, 공보다 1년 앞서 출생하고 공보다 3년 후에 졸()하였다. 아들 홍일우()를 낳았으니 진사()요, 측실()에서 아들 셋을 두었으니, 홍일정()과 홍일태()는 모두 무과()에 급제하고, 홍일재()는 첨지()이다. 진사의 두 아들은 진사인 홍주욱()과 홍주혁()이며, 세 딸은 주부(簿) 서문택(),현감() 이수문(),사인() 곽재태()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내외 증손과 현손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공의 인품과 지위로 절세()의 기재()를 겸했으니, 마땅히 사단()의 맹주()가 되어 명성을 크게 떨쳐야 하는데, 세상에서 말살()되어 진도()가 항상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여 군부()의 수령으로 배회하다가 크게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어찌 명()이 아니랴? 그러나 사군자()는 참으로 먼저 그 큰 근본을 세우지 않는다면 문장은 곧장 찌꺼기일 뿐이다. 공은 일찍부터 ≪춘추()≫를 강()하여 그 대의()를 터득해서 탄식하고 신음하는 것이 모두 명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뿐이어서, 노선생(, 송시열)으로 하여금 심교()를 허여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 장려함이 족히 백세()에 영원히 전해질 것이니, 세상에 살면서 극도로 영화를 누리고도 죽어서 일컬을 만한 것이 없는 자에 비교하면 그 득실()이 어떤가? 내가 일찍이 공을 낙하()에서 뵙고 그 장덕()과 풍의()를 우러렀는데, 그러다가 화양 문하에 노닐면서 더욱 그분의 평생을 듣고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시들지 않았었다. 이제 공의 증손 진사 홍태후()가 묘문()을 부탁하는데 내가 어떻게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겠는가? 삼가 행장()에 의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고운(, 최치원()의 호)이 떠난 후에 후운정()이 있네. 물외()에 초연하니 깨끗한 향기 계승했네. 홀로 거문고 연주하며 음률 감상했네. 사람은 멀어졌고 산이 텅 비어 자취가 이미 인몰되었네. 내가 비석에 명()을 써서 금세와 후세에 알리네.

홍석기[洪錫箕]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