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남일면 화당리 삼현려(南一面 花塘里 三賢閭)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남일면 화당리 삼현려(南一面 花塘里 三賢閭)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10. 14. 10:38

 

남일면 화당리 지장골에 있는 송시영묘 밑에 위치하고 있는 삼현려이다.

삼현려와 관계되는 인물로서는 송구수와 송인수 성제원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측할수 있다.

삼현려와 관계있는 중요 사람으로는 송구수(1497년(연산군3) - 1538년(중종33))를 들수있다.

 

 

송구수는 조선 전기의 효자로 호는 西阜(서부), 본관은 은진이다. 삼봉 송세양의 장남으로 1497년(연산군3)에 출생하였다. 일찍이 음직으로 영경전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종묘서 부봉사에 전임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였고, 효심과 우애가 두터웠다. 그가 모친상을 당해 여막에 있을 때, 흰 제비가 날아와서 둥지를 틀고 사니 사람들이 그의 지극한 효성에 하늘이 감응한 징조라고 칭송하였다. 송구수는 아우 송인수와 매제인 동주 성제원과 더불어 함께 동거하면서 강학을 하였는데 사람들이 그 거처를 삼현려(충북 청원군 남일면 화당리 소재)라고 불렀다. 그는 특히 아우인 송인수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동생 인수가 권간의 뜻에 거슬려 귀양 갔을 때 제수(동생의 처)가 홀로 한성에 남아 있다가 전염병에 걸리었는데, 이 때 좋은 약을 구하여 간호에 힘써 쾌유케 했다. 또한 송인수가 유배지에서 이질에 걸리자 직접 그곳에 달려가서 병을 돌보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537년(중종32) 동생 송인수가 사면되어 돌아왔으나, 그는 42세로 일생을 마치었다. 성제원은 그의 묘에 '효자 모의 묘'라고 썼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묘는 충북 청원군 남이면 사현리에 있다. 송구수는 효심·우애의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회덕사회의 자치와 질서정립을 위하여 <회덕향안>을 창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송구수는 회덕향안 중 초기본인 <임자본향안>에서 송씨 중, 최상 한 연대의 인물로 되어 있다.

 

 

 

삼현려에 대하여는 송시영의 묘갈명에도 나타나고있다

송시영의 묘갈에 글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야은공(野隱公)의 장례를 치른 뒤에 신재(愼齋)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썼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그의 아들 송기륭(宋基隆)이 장차 묘소에 표석(表石)을 세우려고 나에게 사실을 기록해 달라고 하였다. 아! 공의 대절(大節)이 태양처럼 명백하니, 사실의 기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은 쓰지 않을 수 없다. 삼가 살펴보니, 송씨(宋氏)의 관향은 은진(恩津)인데, 그 시조는 여산(礪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조(高麗朝) 때 판사(判事) 송대원(宋大原)이란 분이 있었고 그 뒤 집단(執端) 송명의(宋明誼)란 분은 명망과 덕행이 정 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 제현들과 동등하였다. 고조 송세량(宋世良)은 참봉(參奉)으로 참판(參判) 벼슬에 추증(追贈)되었고 증조 송귀수(宋龜壽)는 봉사(奉事)로 참판(參判) 벼슬에 추증되었다. 참판은 효도와 우애가 뛰어나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을 때 하얀 제비가 처마에 집을 지었던 이상한 일이 있었고, 아우 규암(圭庵) 문충공(文忠公) 송인수(宋麟壽) 및 매제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과 같이 집에서 학문을 강론하였기 때문에 그가 거처하는 곳이 ‘삼현려(三賢閭)’라는 호칭이 있었다. 할아버지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는 판서(判書) 벼슬을 추증받았고 아버지 좌랑(佐郞) 송방조(宋邦祚)는 참의(參議) 벼슬을 추증받았는데, 호는 습정(習靜)이다. 습정공이 청렴과 정도로 일세의 감복을 받았으나 폐주(廢主) 광해군(光海君) 때에 소인배들의 미움을 받은 바람에 하위에서 곤궁하게 지내다가 일생을 끝마쳤다. 어머니 정씨(鄭氏)는 감정(監正) 정곡(鄭谷)의 딸인데, 만력(萬曆)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 12월 2일에 공이 태어났다.

습정공이 살아 있을 때 공의 뜻을 안 사람들이 이미 감복하였고 장가를 들자 제사를 예절에 따라 받들고 편친(偏親)을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여러 아우들과 우애하고 고장의 친척들과 의리가 있었다. 인조(仁祖) 초기에 고장 사람들이 공의 여러 가지 행실을 감사(監司)에게 추천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오랑캐가 침범하자 공이 동지들을 모아 임금을 위해 싸우려고 하였다.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이 공의 공로와 덕행을 추천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 사재감 참봉(司宰監參奉)에 임명되어 봉사(奉事)ㆍ직장(直長)을 거쳐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로 승진하였다가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전직하였다. 자신의 검속을 매우 엄하게 하니, 부임하는 곳마다 간사한 서리들이 움츠러들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변방의 경보가 갑자기 이르자 공이 조정의 의논에 따라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따라 강도(江都)로 들어갔다. 이듬해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정월 22일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 강도를 포위하니, 공이 동료인 죽창(竹窓) 이시직
(李時稷)과 의논하여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여 나라에 공헌해야 한다는 의리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이내 자결(自決)하였는데, 때는 이달 23일이었다. 난리가 안정된 뒤에 영동현(永同縣) 서쪽 투숙동(投宿洞)으로 반장(返葬)하였다.

부인 이씨(李氏)는 옛날 유명한 재상 이탁(李鐸)의 증손으로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된 이여(李勵)의 딸이다. 공이 죽자 슬퍼하다가 심하게 야위어 그해 10월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소 곁에 묻히었다. 큰아들은 바로 송기륭(宋基隆)이고 그 다음 2남은 모두 일찍 죽었다. 큰딸은 이석형(李碩馨)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이덕우(李德宇)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송원석(宋元錫)ㆍ송광석(宋光錫)ㆍ송윤석(宋允錫)이다. 주상이 정문(旌門)을 세워 줄 것을 명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과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에게는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의 벼슬을 추증하고 공의 아들에게는 참봉(參奉) 벼슬을 주었다. 강도의 백성들이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김 선원(金仙源, 김상용
(金尙容))ㆍ이 충숙(李忠肅, 이상길(李尙吉)) 이하 8명을 제사지내면서 공의 신주도 몇 번째 자리에 모셨는데, 조정에서 충렬사(忠烈祠)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또 회덕(懷德) 영동(永同)에 사당을 건립하여 공의 신주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다.

아! 공은 당시에 지위가 낮았고 또 오랑캐가 성안을 소탕하지 않았으므로 살려고 하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반드시 조그만 일신(一身)으로 제공(諸公)들보다 앞서 의리를 취하여 천고의 강상(綱常)을 부식하였음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비록 일월(日月)과 빛을 다툰다고 하더라도 가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한 줄만 알고 그렇게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공이 젊어서부터 습정공에게 가르침을 받아 의리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실행하고야 말았기 때문에 가정 안의 행실이 매우 반듯하였는데, 고인 중에 찾아보아도 필적할 만한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였더라면 어떻게 이를 성취할 수 있었겠는가? 공은 나와 당내(堂內)의 지친으로 30년간 섬겨 오면서 보았는데, 공의 언행(言行)은 모두 다 기록할 만하였으나 또한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러나 또 군더더기를 덧붙일 필요가 뭐 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산악(山岳)처럼 드높고 일월(日月)처럼 찬란하니, 오직 이 언덕을 천추토록 우러러보리로다.

[네이버 지식백과] 송시영 [宋時榮]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 비는 1689년에 건립된 삼현여비(三賢閭碑)로 송구수, 송인수 형제와 이들의 매제인 성재원의 학문과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송구수의 본관은 은진, 호는 서준이다. 그는 학문이 뛰어났고 행실이 단정하였으며,성품이 온화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묘앞에다 집을 짓고 묘를 지키고 있는데 흰제비가 날아와서 집을 지었다고 할 정도로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으며 벼슬은 봉사에 이르렀다.
송인수의 자는 미수, 호는 규암으로 연산군 5년(1499년)에 회덕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겨 널리 경사를 연구하고 중종 17년(152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학문과 도덕은 세상 사람의 모범이 되었으며 조정에 들어가서는 항상 바름과 꿋꿋함으로 나라일을 처리하였으나, 간신들의 시기와 모함 때문에 명종 2년에 죽었다. 그후 현종 1년(1660년)에 호조판서에 증즉되었고, 문충공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이 비가 서있는 곳에 바로 송구수 형제와 매제 성제원이 한방에서 서로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당시의 사대부들이 그 앞을 지나갈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3현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비문은 증손인 송시열이 짓고, 김수증이 썼다.


 三賢閭碑
三賢閭
維我黑巖府君墓文 慕齋金先生所撰也 稱道三賢事行 雖約 而蓋知其氣象規模也 其文刊行於金先生文集 擧世皆知之矣 當時 過其閭者 無不肅恭 曰此三賢所居也 故 有此名焉其居實在漢師之盤松坊鍮店洞 今此淸州馬巖里者 府君歸老之所 衣履之藏而文忠公畢命之地也 成東洲夫人墓 祔在府君傍 西阜府君墓亦五里而近 三賢遺跡 蓋多在此 此名之稱 於此亦久矣 噫 三賢事行 固爀爀照人耳目而金惕庵謹恭 亦府君側出女壻也 其以儒學見稱於野史者甚彬彬焉 豈當時 德星偏照於府君一家也耶 然其不入於三賢之數者 豈以其季輩差後故耶 自是以後 府君曾孫則 有習靜公諱邦祚 淸名直道爲世所宗 我先府君睡翁公 諱甲祚 從氏忠顯公諱時榮 樹立卓然 褒典輝煌 自後 此閭益著顯於無窮矣 德厚者流光 豈不信哉 文忠公受 後命時 府君祠版 極有靈異 玆事 載在名臣言行錄 昔余初受禍時亦然 其謂父子祖孫 幽明異塗者 誠不知天理者也 黑巖府君諱世民字貞夫 西阜府君諱龜壽 字耆叟 文忠公諱麟壽 字眉叟 成東洲諱悌元 字子敬 西阜以不卽所謂三賢 而寔黑巖府君之子與壻去
崇禎紀元後六十二季己巳六月日
西阜公曾孫 時烈 謹識
安東 金壽增 書


삼현여비(三賢閭碑)

우리 흑암부군(黑巖府君)의 묘문(墓文)은 모재(慕齋, 金安國의 호) 김선생이 지은 것으로, 삼현(三賢)의 사적을 칭도(稱道)함이 비록 간략하나 그 기상과 규모를 대개 짐작할 수 있다. 그 글은 김선생의 문집에 실려 온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다. 당시에 그 마을을 지나는 자는 반드시 몸가짐을 엄숙히 하고 공경하면서, ‘이곳은 세 어진이가 살던 곳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있게 되었다. 그 자리는 실로 한양(漢陽)의 반송방(盤松坊) 유점동(鍮店洞)에 있다. 지금 이곳 청주(淸州)의 마암리(馬巖里)는 부군(府君)이 귀향하여 노년을 보내던 곳이고 무덤이 있는 곳이며, 문충공(文忠公, 宋麟壽의 시호)이 목숨을 마친 곳이다. 성동주(成東洲, 成悌元의 호)의 부인의 무덤이 부군의 무덤 곁에 있고, 서부부군(西阜府君)의 무덤도 5리 가까이에 있어, 삼현의 유적이 여기에 많이 남아있으므로 이 이름이 이곳에 일컬어진지도 역시 오래되었다.

아, 삼현의 사적이 진실로 사람의 이목(耳目)에 훤하게 빛남은 말할 것도 없고, 척암(惕庵) 김근공(金謹恭)도 부군의 측실(側室) 소생의 사이로서 유학(儒學)으로 야사(野史)에 매우 드러나게 칭도되었으니, 이 어찌 당시의 덕성(德星)이 편벽되게 부군의 집에만 비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가 삼현의 수(數)에 들지 못함은 연배(年輩)가 조금 뒤인 까닭이 아니겠는가. 이후에도 부군의 증손 습정공(習靜公) 휘(諱) 방조(邦祚)가 청명(淸名)과 직도(直道)로 세상 사람에게 존중되었고, 우리 선부군(先府君) 수옹공(睡翁公) 휘 갑조(甲祚)와 종씨(從氏) 충현공(忠顯公) 휘 시영(時榮)이 절의가 뛰어나서 포상(褒賞)의 은전이 빛났으므로, 그 후로 이 마을이 더욱 먼 후세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덕이 두터운 자는 덕을 후세에 전한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문충공이 귀양을 가서 사사(賜死)의 명을 받을 때에 부군의 사판(祠版, 위패)에 매우 영이(靈異)한 일이 있어 이 일이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에 실려 있고, 지난날 내가 처음 화를 받을 때에도 그러하였으니, 이른바 ‘부자(父子)와 조손(祖孫)이 유명(幽明)의 길을 달리한다’는 말은 진실로 천리(天理)를 알지 못한 것이다.

흑암부군의 휘는 세량(世良), 자는 정부(貞夫)이고, 서부부군의 휘는 귀수(龜壽), 자는 기수(耆叟)이며, 문충공의 휘는 인수(麟壽), 자는 미수(眉叟)이고, 성동주의 휘는 제원(悌元), 자는 자경(子敬)이다. 서부부군 이하가 이른바 삼현으로, 바로 흑암부군의 아들과 사위이다.
숭정(崇禎) 기원후 62년 기사(己巳) 6월 일에 서부공의 증손 시열(時烈)은 삼가 짓고, 안동(安東) 김수증(金壽增)이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