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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면 화당리 충현묘(南一面 花塘里 忠顯廟) 본문
충현사는 조선 정조 8년(1784)에 병자호란때 순절한 사복시주부(司僕侍主簿) 충현공(忠顯公) 야은(野隱) 송시영(宋時榮, 1588∼1637)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은진 송씨(恩津宋氏)의 사당이다. 매년 기일인 음력 정월 23일에 향사하고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89년에 중건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충현묘(忠顯廟)"라는 편액을 걸었다.
송시영(1588 ~ 1637)은 본관 은진(恩津). 자 공선(公先)·무선(茂先). 호 야은(野隱). 시호 충현(忠顯). 1628년(인조 6) 김장생의 천거로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이 된 뒤 직장(直長) 등을 거쳐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에 올랐다. 1636년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江華)로 갔다가 1637년 성이 포위당하자 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했다. 좌찬성이 추증, 강화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야은 송시영의 묘갈명에 보면
야은공(野隱公)의 장례를 치른 뒤에 신재(愼齋)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그의 묘지명(墓誌銘)을 썼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그의 아들 송기륭(宋基隆)이 장차 묘소에 표석(表石)을 세우려고 나에게 사실을 기록해 달라고 하였다. 아! 공의 대절(大節)이 태양처럼 명백하니, 사실의 기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기록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은 쓰지 않을 수 없다. 삼가 살펴보니, 송씨(宋氏)의 관향은 은진(恩津)인데, 그 시조는 여산(礪山)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조(高麗朝) 때 판사(判事) 송대원(宋大原)이란 분이 있었고 그 뒤 집단(執端) 송명의(宋明誼)란 분은 명망과 덕행이 정 포은(鄭圃隱, 정몽주(鄭夢周)) 제현들과 동등하였다. 고조 송세량(宋世良)은 참봉(參奉)으로 참판(參判) 벼슬에 추증(追贈)되었고 증조 송귀수(宋龜壽)는 봉사(奉事)로 참판(參判) 벼슬에 추증되었다. 참판은 효도와 우애가 뛰어나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을 때 하얀 제비가 처마에 집을 지었던 이상한 일이 있었고, 아우 규암(圭庵) 문충공(文忠公) 송인수(宋麟壽) 및 매제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과 같이 집에서 학문을 강론하였기 때문에 그가 거처하는 곳이 ‘삼현려(三賢閭)’라는 호칭이 있었다. 할아버지 도사(都事) 송응기(宋應期)는 판서(判書) 벼슬을 추증받았고 아버지 좌랑(佐郞) 송방조(宋邦祚)는 참의(參議) 벼슬을 추증받았는데, 호는 습정(習靜)이다. 습정공이 청렴과 정도로 일세의 감복을 받았으나 폐주(廢主) 광해군(光海君) 때에 소인배들의 미움을 받은 바람에 하위에서 곤궁하게 지내다가 일생을 끝마쳤다. 어머니 정씨(鄭氏)는 감정(監正) 정곡(鄭谷)의 딸인데, 만력(萬曆)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 12월 2일에 공이 태어났다.
습정공이 살아 있을 때 공의 뜻을 안 사람들이 이미 감복하였고 장가를 들자 제사를 예절에 따라 받들고 편친(偏親)을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여러 아우들과 우애하고 고장의 친척들과 의리가 있었다. 인조(仁祖) 초기에 고장 사람들이 공의 여러 가지 행실을 감사(監司)에게 추천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 인조 5년)에 오랑캐가 침범하자 공이 동지들을 모아 임금을 위해 싸우려고 하였다.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이 공의 공로와 덕행을 추천하였다.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 사재감 참봉(司宰監參奉)에 임명되어 봉사(奉事)ㆍ직장(直長)을 거쳐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로 승진하였다가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로 전직하였다. 자신의 검속을 매우 엄하게 하니, 부임하는 곳마다 간사한 서리들이 움츠러들었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변방의 경보가 갑자기 이르자 공이 조정의 의논에 따라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따라 강도(江都)로 들어갔다. 이듬해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정월 22일에 오랑캐가 강을 건너 강도를 포위하니, 공이 동료인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과 의논하여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여 나라에 공헌해야 한다는 의리를 따르기로 결정하고 이내 자결(自決)하였는데, 때는 이달 23일이었다. 난리가 안정된 뒤에 영동현(永同縣) 서쪽 투숙동(投宿洞)으로 반장(返葬)하였다.
부인 이씨(李氏)는 옛날 유명한 재상 이탁(李鐸)의 증손으로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된 이여(李勵)의 딸이다. 공이 죽자 슬퍼하다가 심하게 야위어 그해 10월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소 곁에 묻히었다. 큰아들은 바로 송기륭(宋基隆)이고 그 다음 2남은 모두 일찍 죽었다. 큰딸은 이석형(李碩馨)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이덕우(李德宇)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송원석(宋元錫)ㆍ송광석(宋光錫)ㆍ송윤석(宋允錫)이다. 주상이 정문(旌門)을 세워 줄 것을 명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과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에게는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의 벼슬을 추증하고 공의 아들에게는 참봉(參奉) 벼슬을 주었다. 강도의 백성들이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김 선원(金仙源, 김상용(金尙容))ㆍ이 충숙(李忠肅, 이상길(李尙吉)) 이하 8명을 제사지내면서 공의 신주도 몇 번째 자리에 모셨는데, 조정에서 충렬사(忠烈祠)의 편액을 하사하였다. 또 회덕(懷德) 영동(永同)에 사당을 건립하여 공의 신주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다.
아! 공은 당시에 지위가 낮았고 또 오랑캐가 성안을 소탕하지 않았으므로 살려고 하면 살 수 있었다. 그런데 반드시 조그만 일신(一身)으로 제공(諸公)들보다 앞서 의리를 취하여 천고의 강상(綱常)을 부식하였음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비록 일월(日月)과 빛을 다툰다고 하더라도 가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한 줄만 알고 그렇게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공이 젊어서부터 습정공에게 가르침을 받아 의리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실행하고야 말았기 때문에 가정 안의 행실이 매우 반듯하였는데, 고인 중에 찾아보아도 필적할 만한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였더라면 어떻게 이를 성취할 수 있었겠는가? 공은 나와 당내(堂內)의 지친으로 30년간 섬겨 오면서 보았는데, 공의 언행(言行)은 모두 다 기록할 만하였으나 또한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러나 또 군더더기를 덧붙일 필요가 뭐 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산악(山岳)처럼 드높고 일월(日月)처럼 찬란하니, 오직 이 언덕을 천추토록 우러러보리로다.
송시영 [宋時榮] (국역 국조인물고, 1999.12.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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