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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면 하석리 노봉서원묘정비(賢都面 下石里 魯峯書院廟庭碑) 본문
노봉서원은 광해군2년(1610)에 오시립(吳時立), 오유립(吳裕立), 오명립(吳名立), 보성오씨 일문과 정렴(鄭磏)의 처갓집 자손인 유흥림(柳興霖)이 송인수(宋麟壽)와 정렴(鄭磏)을 모시기 위해 구룡산 자락 노봉에 건립하기 시작하여 광해군7년(1615)에 완공하고 청액소(請額疎)를 올려 효종9년(1658)에 허락을 받아 현종3년(1662) 사액(賜額, 임금이 현판을 내림, 즉 국가 공인 서원)받았다. 1694년(숙종20) 송준길(宋浚吉, 1706년 검담서원으로 옮김), 1695년(숙종 21) 송시열(宋時烈), 1725년(영조1) 권상하(權尙夏)를 추가 배향하였다가 송준길은 부용면 검시에 검담서원을 지어서 빠져 나갔다. 오시립, 송시열, 권상하가 원장을 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된 다음 복원하지 못하고, 터에는 노봉서원묘정비(魯峯書院廟庭碑)만 남아 있다.
노봉서원은 통합청주가 되기전 청원군에서 가장 먼저 세워졌고 가장 먼저 사액(賜額)받았다. 검담서원과 송천서원은 후에 사액받았다. 그러므로 역사적 가치와 비중이 가장 큰데도 복원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서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던 문인과 석학, 정치인, 충신을 모셔서 그들의 뜻과 학문을 따르던 곳으로 그들의 자취와 글을 듬뿍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료를 발굴하고 복원하여 문화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할 것이다. 노봉서원 자료는 다행히 조선왕조실록, 한수재문집, 규암집, 동춘당문집, 죽천집,송자대전, 지선정유고, 영모재집 등에 남아 있다(현도면지, 1998. 참조)
노봉서원 묘정비명을 국역해 놓은것이다.
지난 경술년(庚戌光海 1610)에 고을 선비 지선정(止善亭) 오명립(吳名立)이 진사 유흥림(進士柳興霖)과 더불어 개연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우리 사림들이 두 선생을 높이 사모하는 데 어찌 이 고을에 사우와 서원을 건립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우러러보며 일으키게 하지 않는가?”하고 시작한 지 5년이 지나 비로소 준공하게 되었다.
이 노봉에는 바위와 골짜기도 있고 뛰어난 숲과 샘도 많으니 여기에 사우를 세우고 제향을 올리면 여러 사람의 마음에 흡족할 것이라 하여 효종 무술년(1658)에 사액할 것을 청하여 윤허(효종 10년 기해(1659))를 받고 현종 임인(1662)년에 편액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므로 사당의 모습과 서원의 규모가 더욱 다시 융성하고 중후해졌다.그 후 33년 숙종 갑술(1694)년에 우암 송문정선생 (문정공 우암 송시열)을 추후로 받들어 배향했으니 심히 성대한 거사라 하겠다. 아! 아름답지 않은가?
규암선생의 휘는 인수(麟壽)인데 타고난 천품이 도에 가까웠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말씀을 냄과 행동을 제재함이 모두 옛 교훈에 부합되었다. 기묘년(己卯年)에 선비들이 무참히 도륙당한 나머지 사림의 기세가 사라져 버린 때도 홀로 성현을 반드시 배워야 하며 삼대의 정치로써 반드시 복구하여야 한다 하고 그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기기에 이르러서는 기필코 배운 바를 펴서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다가 명종 을사(1545)년에 삭탈관직 당하고 물러와 청주 선영 아래에서 살았는데 한 집에서 도서(圖書)를 마련하고 신명(神明 천지신명)을 대한 듯 했다.
명종 정미(1547)년에 벽서(壁書 규암을 몰아대는 흉서 벽보) 사변이 생겨서 후명(後命 귀양살이할 때 사약을 내림)이 이르매 목욕하고 관대(冠帶)를 갖춘 뒤에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조용히 후명에 임하였다. 문인에게 편지를 보내며 이르기를 “저 하늘과 땅에게나 가히 마음을 표시할 것이라.”하고 아들에게 교훈을 끼쳐주어 이르기를 “나를 경계 삼아 착한 일 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고 하였다. 선조(宣祖)께서 왕위에 오르시자 특별히 명하여 원통함을 풀어주고 관직을 복구했다. 현종조(顯宗朝)에서는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북창선생(北窓先生)의 휘는 렴(磏)인데 낳으면서 영특하여 널리 삼교(三敎 유교 불교 도교(선교))를 관통했으나 성학(聖學 유학) 만으로 마음을 정립하는 근본을 삼았다. 공부에 말미암지 않고서도 스스로 고명한 곳에 이르렀으며 여러 기예도 각각 오묘한 위치까지 올랐다.일찍이 말하기를 “성인의 학문은 인륜으로 중요함을 삼고 그 오묘한 곳은 논의하지 않았다. 선․불인즉 마음을 닦고 성품을 보는 것으로 근본을 삼고 아래에서 배우는 곳은 전체로 폐지했으니 이것이 3교가 다른 바이다.”
대체로 깊은 곳까지 통하는 지식과 아득한 곳까지 잠겼던 학문은 판에 박힌 유림과 굽은 학자는 엿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일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면 울며불며 따랐은즉 충효가 돈독한데서 나왔다 할 것이다. 현감(縣監)의 자리를 물리치고 괘라리(掛蘿里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으니 일민(逸民 숨어 있는 뛰어난 사람)의 청백에도 맞고 권도에도 맞는가?
우암선생의 휘는 시열(時烈)인데 도학의 정대와 사업의 성대함은 실상 지난 세대를 계승하고 오는 세대를 개척했는데 효종(孝宗)의 물과 물고기 같은 대우에 춘추(春秋 공자가 지은 역사)의 의리를 잡고 세도의 책임을 맡아서 성대하게 백대의 사종(師宗)을 이루었다. 일찍이 본원(本院 노봉서원)에서 오래 동안 원장의 스승 자리에 있으면서 강마(講磨 강론하고 연마함)하고 인도하여 많은 선비를 배출하여 덕화가 성대하였는데 불행이도 황파(黃巴 사약을 내린 지명인 듯)에 화변이 일어나 후학들이 우러를 바가 없다가 경화(更化 신원이 회복됨)되는 초기에 특별이 관직이 복구되고 시호의 하사를 받게 되었으니 조가(朝家 조정)에서 높이 보답하는 것이 지극하였다.
또한 바로 성무(聖廡 문묘)에 배향되었고 정종조(正宗朝)에 이르러서 성대(盛代 성세)의 은전(제사)은 더욱 융성하여 나머지의 유감이 없었다. 한 세대에서는 송자(宋子)로 일컬어 왔다.
아! 선생의 유풍의 여운이 다하지 않았으니 누가 사모하지 않겠는가? 이 서원이 존재하므로써 참으로 높은 산갈이 우러러보는 회포를 부칠 곳이 있어서 깊이 바라보며 의지하는 바가 될 것이다.
동춘 송문정공(宋浚吉)도 역시 정묘(丁卯)년에 추향하였는데 을해(乙亥)년에 서원에 중첩하여 배향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기 때문에 검담(黔潭 부용면 검호리 검담서원)으로 옮겨 봉안했으니 두 서원의 거리가 망창(莽蒼 넓은 들판)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여러 선비들이 능히 함께 존숭하는 성의를 펴게 되었다. 아! 성대한 일이다.가만히 생각하자면 세 선생(圭菴 北窓 尤菴)의 문정(門庭 속)에 조예는 서로 다르겠으나 요약해 보면 모두 인의로써 성품을 삼고 충효로는 행동을 삼고 성현으로 법도를 삼아 이단을 사절하여 양주(楊朱 이기주의자)와 묵적(墨翟 겸애주의자) (儒家의 이단자들)을 물리쳐서 공로를 삼았으니 바퀴는 다르다 해도 같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체로 이 서원에 들어오는 자는 가히 조심하여 모범을 상상해보지 않겠는가? 서원을 창설한 지도 수 백 년이 되었는데 비로소 희생을 매어 두는 비석(비석에 제사에 쓸 짐승을 매어단다는 뜻) 세우게 되므로 드디어 이와 같이 쓴다.
비석은 지선오공(止善 吳公 명립)의 후손 현섭(鉉燮)이 세우는 일을 맡았는데비석에 쓰기를
아! 우리 삼현(三賢, 송인수 정렴 송시열)의 뜻은 크다
학문의 바퀴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방향은 같았네.
성조(聖朝 왕조)의 유현(유학자), 밝은 시대의 일민(逸民 숨어사는 능력있는 사람)이네.
남긴 풍도 백년을 내려오며 후세 사람을 일깨우고 도와
사람들이 사모하여 향기로운 제물로 제사 올리는구나
노봉(서원) 바위와 샘은 맑고 깊고
빛나는 서원 곁 담장과 기와에는 이끼도 없구나.
우리 선비들은 길이 바라보고 의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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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學宋煥箕撰
文義之縣北楮山。有圭菴宋先生衣履之藏。縣西獐山。有北窓鄭磏先生薖軸之墟。粤在萬曆庚戌。縣士止善亭吳公名立。與進士柳公興霖。慨然歎曰。凡我士林之尊慕兩先生者。盍設祠院於玆土。使學者日夕瞻望而興起焉乎。爰始經紀。閱五載而竣工。唯玆魯峯。有巖壑林泉之勝。而于以建祠醊侑。允愜群情矣。孝宗戊戌。請額蒙允。顯宗壬寅。宣額賜祭。廟貌院規。益復隆重。後三十三年肅宗甲戌。尤菴宋文正先生。追奉躋享。甚縟擧也。於不休哉。圭菴先生諱麟壽。天姿近道。誠心好學。出言制行。動合古訓。當己卯斬伐之餘。士氣銷鑠之時。獨以聖賢爲必可學。三代爲必可復。至其立朝事君。則期展所學。盡誠殫心。明廟乙巳。削官退處于淸州之先墓下。一室圖書。對越神明。及丁未壁書之變出而後命至。則沐浴具冠帶。顏色不亂。從容就命。貽書門人曰。皇天后土。可表此心。遺訓胤子曰。勿以我爲戒。怠於爲善也。宣廟卽阼。特命伸冤復官。顯廟朝。贈吏曹判書。諡曰文忠。北窓先生諱。生而靈異。博通三敎。全以聖學。爲立心之本。不由工夫。自到高明。以至方技衆藝。各臻奧妙。嘗曰。聖學以人倫爲重。不論其要妙處。仙佛則以修心見性爲本。下學處全闕。此三敎所以異也。凡其玄通之識。沈冥之迹。非局儒曲學所能闚。而事有難言。號泣以隨。則實出於忠孝之篤矣。解縣紱而養疾于掛蘿里。抑亦逸民之中淸中權者歟。尤菴先生諱時烈。道學之正。事業之盛。實有繼往開來。而膺孝廟魚水之契。秉春秋之義。任世道之責。蔚然爲百代之師宗矣。嘗於本院。久居山長師席。講誘掖。啓迪多士。德化甚盛。不幸黃巴禍作。後學靡所倣仰。逮至更化之初。特蒙復爵賜諡。朝家之崇報。至矣。而亦旣從祀聖廡。至正宗朝。曠世恩典。益無餘蘊。一世以宋子稱焉。嗚呼。三先生之遺風餘韻不沫。百世之下。孰不興慕。斯院之存。儘得以寓高山景行之懷。而永有所瞻依也。同春宋文正公追享。亦曾在丁卯。而乙亥。以其有院享疊設之禁。移奉于黔潭。兩院相距。莽蒼而近。諸章甫。克伸其共尊之誠。猗歟盛矣。竊惟三先生門庭造詣。雖有異焉者。要皆以仁義爲性。而忠孝爲行。聖賢爲法。辭闢爲功。則不害爲殊轍而同歸也。凡入斯院者。可不惕然有以想像模範乎哉。院宇之創。今數百歲。始立牲繫之石。遂書之如此。董成斯役者。止善吳公之來孫鉉燮也。銘曰。
猗我三賢。義闡精微。學雖殊轍。道則同歸。聖朝儒賢。明時逸民。遺風百載。啓佑後人。人所興慕。苾芬以祀。唯玆魯峯。巖泉淸邃。有煌院榜。墻瓦莫苔。凡我衿紳。永言瞻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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