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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내성리 양윤원묘갈(曾坪邑 內城里 楊潤源墓碣) 본문
청주양씨 묘역은 내성동 흑표아파트 뒤편의 계곡부에 증천사(曾川祠)를 중심으로 주변의 능선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내성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內城里)에 자리한 양윤원 묘소에 있는 양윤원묘갈(楊潤遠墓碣)이다. 1508년(중종 3년)에 세워진 이 묘갈의 묘갈문은 최숙생(崔淑生)이 짓고, 박세영(朴世榮)이 글씨를 쓴 것이다. 양윤원(1445~1506년)은 1467년(세조 13년)에 내금위(內禁衛)에 소속되었다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성종조에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고 한다. 그는 1475년(성종 6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좌부장(左部將), 통판(通判)과 북청부사(北靑府使)를 거쳐,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 부령부사(富寧府使)와 회령부목사(會寧府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묘갈문에는 그의 가계(家系)와 관력(官歷), 그리고 가족사항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청주양씨묘역은 증평군 향토유적 10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묘역중에서 산자락 맨위에 자리하고 있는 양윤원의 묘지이다. 신,구비석이 나란히 있으며 묘역은 후손들에 의하여 잘 관리되고 있다.
청주양씨 묘역을 찾는길은 두군데가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내성동 흑표아파트에 차를 세우고 아파트 뒷문을 이용하여 묘역을 찾는 방법이 가장 좋다. 묘역은 아파트 뒷문과 거의 같이 있다.
안악 양씨(安岳 楊氏) 시조(始祖) 양만수(楊萬壽)는 청주 양씨(淸州 楊氏)의 시조인 상당백(上黨伯, 상당(上黨)은 청주(淸州)의 옛 이름) 양기(楊起)의 셋째아들이다. 고려(高麗) 때에 전서(典書)를 지냈고 공(功)이 많아 안악군(安岳君)에 봉(封)해졌다. 원래(原來) 청주 양씨(淸州 楊氏)였으나 시조(始祖)의 공적(功績)을 기려 후손(後孫)이 후대(後代)에 분적(分籍)해서 본관(本貫)을 안악(安岳)으로 삼았다고 한다. 양만수(楊萬壽)의 아들 양정간(楊貞幹)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歷任)하였고, 증손 양식(楊湜)은 좌찬성에 올라 안원군에 봉(鳳)해졌으며, 양식의 맏아들 양정(楊汀)은 판서(判書)를, 둘째아들 양호(楊浩)와 셋째아들 양형(楊泂)은 현령(縣令)을 역임(歷任)했다. 그런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한국계행보(韓國系行譜)》,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안악 양씨(安岳 楊氏)의 시조(始祖)가 판사(判事)를 지낸 양응(楊凝)이라고 하였고, 안악 양씨(安岳 楊氏)의 또 한 파(派)의 시조(始祖)가 부사(府使)를 지낸 양윤원(楊潤源)이라고 하였다.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판의금부사 행 가선대부 회령도호부사 청주 양공 윤원의 묘(贈崇政大夫議政府左賛成 兼判義禁府事 行嘉善大夫會寧都護府事 淸州楊公潤源之墓)라고 음각된 신,구 비석이 무덤앞에 있다.
楊潤源 墓碣
贈崇政大夫議政府左賛成 兼判義禁府事 行嘉善大夫會寧都護府事 淸州楊公潤源之墓
弘文館校理徐君厚 指表叔楊公行狀示於徵幽誄 甚懇辭不獲巳 謹按 楊氏安岳望族也 公諱潤源 字子根 曾王父文澤奉常大夫開城少尹 生湜贈崇政大夫議政府左賛成安原君 生沚世子翊衛司左衛率 娶奉禮金汝容女 生公 幼岐嶷魁梧 及長武勇善射 爲儕輩所推重 成化紀元三年屬內禁衛 是年李施愛叛 公從征功最 主將有忌功
者不錄勳 公無纖芥懷 成廟即位錄原從功 六年登武科第三 歷授左部將通判北靑府使再期 丁內憂服闋拜訓鍊判官 再轉安州判官 弘治元年拜昌城府使 遞居何召入宣傳官 陞訓鍊副正 時平安驛路凋弊大臣以公啓 授大同察訪 及至革擧弊興一道賴以安 周歲以外憂去 十一年拜富寧府使 時年年飢饉 公盡心賙恤民 咸仰之如父
母 當遞期觀察使啓 以撫字爲一道特加睿奬陞資通政 仍留一年及還拜驪州牧使 未幾命擇文武全才堪爲將帥者 時相亦以公爲首選 還拜僉知中樞兼都正訓鍊 十八年移兵曹叅知 正德元年陞嘉善大夫會寧府牧使 杖鉞未久恩威并行 戒人至以爺爺呼之 丙寅六月 日以疾卒于官廨 享年六十二 公天性俊爽雄深沉 毅不立崖角 能與物推移 而仁於宗族信於朋友 下至厮僕皆懷 其惠前後莅官 皆以恩愛有去後思 人皆以大器期之位纔二品 不施所蘊莫不痛惜 以王子婦翁贈爵左賛成例也 公先娶司諫李适女生二男一女 長曰洙別提 次曰濱司勇 女適德原君曙世祖大王子 無嗣 後娶護軍林盛孫女生一男 曰淳幼 洙娶峽城守李偵女生一男皆幼 濱娶忠順衛林稠女歲丙寅洙等轝公喪至淸安縣 越丁卯 葬于縣西相佛見里之原 盖從先祖兆域也 銘曰揭揭楊公 天資環瑋 惠及雷封 淸安古縣 有吉者兆 歷代慶繁
鍾秀山岳 心亦倜落 威布擴俗 山周水複 爲公之宅 視此竁石正德三年戊辰五月 日誌
奉正大夫弘文館直提學 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崔淑生 撰 成均進士 朴世榮 書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판의금부사(兼判義禁府使) 행(行) 가선대부(嘉善大夫) 회령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 청주(淸州) 양공(楊公) 윤원(潤源)의 묘(墓)
홍문관 교리 서군(徐君) 후(厚)가 표숙(表叔)인 양공(楊公)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묘갈을 써 주도록 부탁하는 것이 심히 간절하였다.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삼가 살피건대, 양씨(楊氏)는 안악(安岳)의 명망 있는 가문이다. 공의 휘(諱)는 윤원(潤遠)이고 자(字)는 자근(子根)이다. 일찍이 왕부(王父) 문택(文澤)은 봉상대부(奉常大夫) 개성 소윤(開城少尹)으로 식(湜)을 낳아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안원군(安原君)은 지(沚)를 낳았는데 세자 익위사 좌위솔(世子翊衛司左衛率)로 봉례(奉禮) 김여용(金汝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영리하였으며 체격이 크고 건장하였다. 장성하여서는 굳세고 용감하였으며 활을 잘 쏘아 동년배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다. 성화(成化) 기원 3년(세조 13, 1467년)에 내금위(內禁衛)에 소속되었다. 이해에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공이 난리를 평정한 공로가 컸다. 주장(主將)이 공로가 있는 자를 꺼려서 녹훈(錄勳)하지 않았으나 공은 조금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성묘(成廟)가 즉위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6년에 무과에 3등으로 등과하였다. 좌부장(左部將), 통판(通判)을 역임했으며, 북청 부사(北靑府使)를 두 번째 맡았을 때, 모친상을 당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훈련원 판관에 제수되었고 안주 판관(安州判官)을 두 차례 역임했다.홍치(弘治) 원년(성종 19, 1488년)에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어 하소(何召)에 머무르던 중 선전관(宣傳官)으로 들어가 훈련원 부정(副正)으로 승진했다. 당시 평안도의 역로(驛路)가 쇠퇴하는 폐단이 있자 대신들이 공을 천거하여, 대동 찰방(大同察訪)에 제수되었다. 급기야 폐단을 혁파하고 한 도(道)를 일으켜 안정되게 하였다. 1년이 지나자 외우(外憂)가 사라졌다.
홍치 11년(연산군 4, 1498년)에 부령 부사(富寧府使)에 제수되었다. 당시 해마다 기근이 들었는데 공은 마음을 다해 백성을 진휼(賑恤)하여, 백성이 모두 우러러보기를 부모와 같이 하였다. 임기가 다하여 관직이 교체될 시기를 맞아 관찰사가 장계(狀啓)로 아뢰기를, 한 도(道)의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폈다고 하여, 특별히 장려를 받고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이로 인하여 1년을 더 머무르다가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 있어 문무를 겸비한 자로 장수(將帥)의 직책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선발하라는 명이 내렸는데, 당시 재상이 또 공을 수망(首望)으로 뽑았다. 다시 첨지중추 겸 도정훈련(僉知中樞兼都政訓鍊)에 제수되었다. 홍치 18년(연산군 11, 1505년)에 병조 참지로 자리를 옮겼다.
정덕(正德) 원년(중종 1, 1506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회령부(會寧府) 목사(牧使)로 승진하였다. 그 지방을 다스린 지 오래지 않아 은혜와 위엄이 아울러 시행되어, 백성들이 마치 아버지가 부를 때처럼 삼가고 조심하게 되었다. 병인년(중종 1, 1506년) 6월 일에 병으로 관아에서 졸하였으니 향년 62세이다.
공은 천성이 빼나고 서글서글하였으며 의젓하고도 침착하였다. 의지가 강하였으나 모난 구석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 알았다. 종족에게는 어질게 대했고 친구에게는 신임을 받았다. 아래로 노복(奴僕)에 이르러서는 모두 그가 베푼 은혜를 입었다. 관직에 나아갈 때를 전후하여 모두 그가 베풀었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약하였으나 지위가 겨우 2품에 머물렀으니, 시행해 보지 못하고 쌓아만 둔 것이 통한스럽고 애석하기 이를 데 없다. 왕자의 장인으로서 좌찬성에 증작(贈爵)된 것이 그 예이다.
공의 첫째 부인은 사간(司諫) 이괄(李适)의 따님인데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수(洙)로 별제(別提)이고, 차남은 빈(濱)으로 사용(司勇)이다. 딸은 덕원군(德原君) 서(曙), 세조대왕(世祖大王)의 아드님에게 시집갔는데, 후사가 없다. 공은 나중에 호군(護軍) 임성손(林盛孫)의 따님을 후취(後娶)로 맞이하여 1남을 두었는데, 순(淳)이라 하며, 어리다. 수(洙)는 협성 수(峽城守) 이정(李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빈(濱)은 충순위(忠順衛) 임조(任稠)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병인년에 수(洙) 등은 공의 상여를 메고 청안현(淸安縣)에 이르렀는데 해를 넘겨 정묘년에 현의 서쪽 상불견리(相不見里)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대개 선조의 조역(兆域)을 따른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높디높은 양공(楊公)이여 타고난 자품 옥 같아라
은혜는 하늘까지 미쳐 청안(淸安) 옛 고을에 길한 조짐 있으니
역대의 경사가 많은 뛰어난 산악이로다
마음 또한 쇄락하고 위엄은 펴져 풍속을 넓히니
산은 두르고 물은 겹쳤네 공의 거처로 삼았으니 이 비석을 보시게나
정덕(正德) 3년 무진년(중종 3, 1508년) 5월 일 기록하다
봉정대부(奉正大夫) 홍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최숙생(崔叔生) 짓다.
성균관 진사 박세영(朴世榮) 쓰다.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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