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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면 덕천사(加德面 德川祠)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가덕면 덕천사(加德面 德川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4. 13. 20:46

 

 

 

 

덕천서원은 유희령(柳希齡)과 유흥룡(柳興龍)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694년(숙종 20) 지방유림의 공의로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그 뒤 우신언(禹愼言)과 정응창(鄭應昌)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699년(숙종 25)부터 향사하다가 1868년(고종 5)에 철폐된 후 1971년에 다시 세웠다.
그 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유림들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사우에는 유희령, 유흥룡,우신언, 정응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1)주벽-유희령(柳希齡, 1480∼155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원노(元老)·자한(子罕), 호는 몽암(夢菴)·몽와(夢窩)·몽노(夢老)·몽초(夢草). 공조참판 종식(宗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봉교를 지낸 문통(文通)이고, 아버지는 예조참의 인귀(仁貴)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현감 장생(長生)의 딸이다. 송인수(宋麟壽)는 그의 문인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고,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해에 권지교서관 부정자가 되었고, 예문관검열,대교·봉교가 되었고, 이듬해 병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남곤(南袞) 등이 일으킨 기묘사화 때 작은아버지 인숙(仁淑)이 화를 당하자 관직을 떠나 문산(文山 : 지금의 文義)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그러나 1520년 다시 정언에 제수되었고, 1524년 영천군수(榮川郡守)로 5년간 재임하였다. 이후 이천부사(伊川府使)와 대구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542년 성절사로 북경에 다녀온 뒤 1543년 호조참의에 제수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되었다가 금산으로 옮겨져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는 ≪표제음주동국사략 標題音注東國史略≫ 12권과 ≪대동시림 大東詩林≫ 65권, ≪대동연주시격 大東聯珠詩格≫·≪송시정운 宋詩正韻≫·≪조종시률 祖宗詩律≫을 편찬하였다.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서 내직에 있을 때에는 서슴지 않고 직간을 올려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였으며,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는 인정을 펴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문필에도 재능이 있었으며, 특히 시를 잘 지어 성절사로 북경에 갔을 때에도 그곳에서 시로 이름을 떨치고 돌아왔다고 한다. 문집으로 ≪몽암집≫ 2권 2책이 있다.
 
2)유흥룡(柳興龍, 1577∼1656)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치운(致雲), 호는 숙옹(塾翁). 아버지는 희령(希齡)이며,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이로(利老)의 딸이다. 평생을 고향인 문산(文山: 지금의 文義)에서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이괄(李适)의 난과 병자호란과 같은 난국에 처하였을 때 국가를 보위하려 하였으나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하였다. 현실적인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대신 학문적 성취를 통하여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의 시문에는 사회의 여러 모순에 대한 비판의식과 내면적인 자기성찰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대부의식 자체를 비판하거나 포기하지는 않고 유가적 지식인으로서의 입장을 지켰다. 그의 학문적 성향은 도학(道學)을 기반으로 당시의 훈고학적인 연구성과를 수용하였다. 끊임없는 연구생활을 통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당시 그의 덕행과 학문을 높이 인정받았으며, 이른바 ‘문산부자(文山夫子)’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다. 죽은 뒤 사헌부감찰에 증직되었으며, 덕천사(德川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숙옹유고≫ 4권 3책이 있다.
 
3)우신언(禹愼言, 1482∼1547)
본관은 단양이며, 호는 묵재(默齋)이다. 찰방을 지냈다.
 
4)정응창(鄭應昌, 1547∼1622)
호는 유항(柳巷)이며 공조좌랑을 증직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우(祠宇)와, 중앙의 신문(神門) 및 양옆 협문(夾門) 등이 있다. 지금의 사당은 1971년에 중건하고 1987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간 마루방에 중앙에 쌍문을 좌우에 쪽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덕천서원(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마당 앞에 삼문을 세우고 담장을 쌓았다.

 

 

 

 

 

 

 

 

 

 

 

 

 

덕천사는 조선 현종 13년(1672)에 병조참의(兵曹參議) 몽암(夢菴) 유희령(柳希齡, 1480∼1552), 숙용(塾翁) 유흥룡(柳興龍, 1577∼1656), 묵재(默齋) 우신언(禹愼言, 1482∼1547), 유항(柳巷) 정응창(鄭應昌, 1547∼1622)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세운 진주 유씨(晉州柳氏)집안의 사당이다.

숙종 25년(1699)부터 향사하다가 고종 5년 (1868)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되었다. 그후 1971년에 다시 세우고 매년 음력 2월 중정일에 향사한다. 지금의 사당은 1971년에 중건하고 1987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중앙에 쌍문을 좌우에 쪽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덕천서원(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마당앞에 삼문을 세우고 담장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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