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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미면 신매리 진후효자각(乷味面 新梅里 陳厚孝子閣) 본문
진후(1834-1908)는 여양인으로 조선 후기 충주 출신의 효자이다.
효성이 인근에 알려지고 관청에까지 소문이 돌아 1884년(고종 21)에 정려가 세워졌다.
정려문은 충주시 살미면 신매리에 있었으나 충주댐 수몰 지역이 되면서 1983년 충주에서 단양으로 가는 국도 36호선 옆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진후효자각은 내사리에서 길을 따라 신매리 문골낚시터를 찾으면 된다. 문골낚시터로 내려가기전 조금더 단양쪽으로 20미터가면 좌측에 진후효자각이 눈에 보인다. 진후효자각 뒤로는 여양진씨들의 무덤이 여러 기 자리하고 있다.
정문은 조선 고종21년(1884)에 세운것으로 건평 1.5평이다. 사면에 홍살을 둘러 보호하고 있으며 민도리 3량집으로 홑치마 우진각지붕으로 되어있다.
짐후효자각 전면에는 효자각(효자각)이란 현판이 붙어있고 정려안에는
유명조선고종갑신이십일년명정려각재무궁동입석신리여양진후지려(有明朝鮮高宗甲申二十一年命旌閭閣在武弓洞立石臣里驪陽陳厚之閭)라고 씌여진 현판이 걸려있으며 옆으로는 진후의 효행내력이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
진후가 8세 때 아버지가 냇물을 건너다 물이 불어나서 떠내려 가는데 이것을 본 진후는 대성통곡하며 자기도 아버지를 따라 죽겠다고 냇물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물결이 잔잔해져 아버지를 구하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경탄했다. 또한 13세 때에는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으며 또한 약을 올리며 대변까지 맛보면서 극진한 간호를 하였다.
효자각(孝子閣)이라 쓰여진 이쁜 이름표를 달고있다.
아버지의 병환에는 자라가 약이라는 의원의 말에 냇물이 꽁꽁 얼어붙은 12월임에도 얼음 위에 엎드려 곡을 하며 기원하니 갑자기 얼음이 갈라지면서 자라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이것으로 아버지께 봉양했더니 오랫동안 앓던 병이 즉시 쾌차하였다. 아버지가 또 병이 나서 수박을 먹고 싶어 하자 눈이 쌓인 겨울철이라 어쩌지 못하다가 봄에 심었던 수박밭을 뒤져 눈 속에서 수박 하나를 발견하여 봉양했더니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혹자는 자라가 아니라 잉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효의 중요성을 나타내고자 하니 그 무엇이든 문제가 있을까?
이러한 말들이 인근 마을은 물론이고 관에 까지 소문이 들어가 조선 고종21(1884년)에 살미면 신매리에 효자각이 세워지게 되였다.
많은 효자이야기가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전국적으로 많이 산재되여 있다.
겨울철에 구할수 없는 과일이나 채소등 또는 한겨울의 잉어등 모티브가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효사상이 근간을 이루었던 조선시대의 한 단편이 아닌가 한다,효자와 열녀등이 배출된 집안을 만들기 위하여 강요된 효사상이 있었음도 짚고 너머가야 하는 어찌보면 슬픈시대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
진후효자각 옆으로 여양인들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 충주댐 수몰로 인하여 현재 이곳으로 이건하여 관리하고 있는 듯 하다.
여양진씨는 전주이씨와 더불어 오랫동안 신매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여양진씨는 원래 중국에서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한 문벌이다. 원조는 송나라 때의 복주 사람 진수(陣琇)이다. 우윤의 벼슬에 있었는데 국란이 일어나자 한반도에 건너와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에 해당하는 여양현 덕양산 아래 정착하였다. 진수의 후손 진총후가 고려에 출사하여 예종 때 신호위대장군(神虎威大將軍)에 이르렀다. 인종조에 김향·이공수 등과 함께 이자겸의 왕위 찬탈 기도를 막은 공으로 여양부원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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